행동을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모두 범죄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개월, 수년에 걸쳐 반복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대방의 일상과 인간관계, 경제적 자율성을 장악해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빼앗는 하나의 '통제 패턴'이 되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반복되는 통제 패턴을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라고 부른다.
그동안 가정폭력 관련 법체계는 때리거나 밀치는 행위, 협박이나 스토킹처럼 특정 시점에 일어난 개별 사건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최근 심리학 연구가 신체적 상처 없는 지속적인 통제 역시 심각한 피해를 남긴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법의 기준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미국 변호사 루스 S. 존슨(Ruth S. Johnson)은 지난 20일 <사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에 기고한 ‘The New State Laws Defining Abuse Without a Single Bruise’에서 강압적 통제에 관한 심리학 연구와 미국의 법제 변화를 짚었다.

<사이콜로지 투데이>에 실린 미국 변호사 루스 S. 존슨의 기사(2026.10.20)에 따르면, 돈·휴대전화·옷차림·인간관계를 반복적으로 통제하는 '강압적 통제'는 신체 폭력 없이도 PTSD·우울증과 유의미한 관련성을 보였고(Lohmann 등, 2024년 메타분석), 경찰 보고서에는 관련 지표 대부분이 10% 미만으로만 기록되는 것으로 나타났다(Hilton 등, 2023). 존슨은 개별 사건 중심의 가정폭력법으로는 장기간 이어진 통제 피해를 포착하기 어렵다며, 하와이가 미국에서 유일하게 강압적 통제를 형사처벌하는 등 '패턴'을 보는 법적 틀이 확산되고 있다고 짚었다. / 이미지 디자인=로이슈 AI 디자인팀(*본 이미지는 기사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것입니다.)
이미지 확대보기■ 때리지 않아도 학대, 개별 행동이 아닌 '반복되는 패턴'이 기준
강압적 통제를 가르는 기준은 한 번의 행동보다 반복되는 패턴에 있다.
돈을 쓰지 못하게 하거나 상대방의 위치를 계속 확인하는 행위, 누구를 만날 수 있는지 제한하는 행동, 옷차림과 음식까지 지시하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상대방을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고립시키거나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겠다고 위협하는 행위도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일부 행동은 그 자체로 기존 형사법의 적용 대상이 된다. 행태에 따라 스토킹이나 괴롭힘, 불법적인 협박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별적으로 보면 불법이 아닌 행동이 장기간 반복될 때다.
하루에 한 번 전화를 건 일, 연인에게 특정 옷을 입지 말라고 한 말, 생활비 지출에 관여한 행동 하나만 놓고 보면 범죄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같은 행동이 반복돼 상대방의 일상을 사실상 지배한다면 개별 사건만 보는 법체계로는 피해의 전체 모습을 포착하기 어렵다.
강압적 통제가 기존 가정폭력법에 던지는 질문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학대는 반드시 한 번의 명확한 '사건'이어야 하는가.
■ 멍은 없어도 PTSD·우울증, 2024년 메타분석이 확인한 상관관계
신체 폭력이 없다고 피해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2024년 발표된 체계적 문헌고찰·메타분석 논문 <강압적 통제가 트라우마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The Trauma and Mental Health Impacts of Coercive Control)>은 강압적 통제와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복합 PTSD,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의 관계를 분석했다. 메타분석은 같은 주제를 다룬 여러 연구의 수치를 한데 모아 다시 계산하는 방법이다.
분석 결과 강압적 통제는 PTSD, 우울증 등 부정적인 정신건강 결과와 유의미한 관련성을 보였다.
눈에 보이는 상처와 심리적 피해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속적으로 감시받고 자신의 행동을 검열해야 하는 상황, 가족이나 친구와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방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환경, 경제적으로 상대에게 종속된 상태가 반복되면 독립성과 안전감 자체가 흔들린다.
그동안 일부 가정폭력 법체계가 개별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작동해왔다면, 메타분석 결과는 앞으로 "무슨 일이 한 번 있었는가"뿐 아니라 "어떤 통제가 계속돼 왔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 경찰 보고서에 남는 통제 흔적은 10% 미만, 출동 경찰은 '사건'을 보고 통제는 '패턴'으로 작동
강압적 통제를 알아보기 어려운 곳은 법정만이 아니다.
친밀한 파트너 폭력 사건의 경찰 기록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강압적 통제를 나타내는 지표 대부분이 경찰 보고서에 기록된 비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예외는 심리적 학대로, 사건의 약 28%에서 기록됐다.
낮은 기록률은 경찰이 개별 사건을 중심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장기간 이어진 행동 패턴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은 우선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관계부터 파악한다. 누가 누구를 때렸는지, 협박이 있었는지, 상처가 있는지는 비교적 확인하기 쉽다.
반면 상대방의 돈을 누가 관리해왔는지, 휴대전화를 얼마나 자주 검사했는지,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한 일이 몇 달 동안 반복됐는지를 한 번의 출동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경찰은 '사건'을 보지만 강압적 통제는 '패턴'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사건과 패턴의 간극은 위험성 평가에도 영향을 준다.
일부 연구에서는 특정 강압적 통제 지표가 과거 폭력 사건 이력만 보는 방식보다 이후 발생하는 친밀한 파트너 폭력을 더 잘 예측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신체폭력 이력만으로 위험성을 판단하면 앞으로의 폭력을 예고하는 다른 신호를 놓칠 수 있다는 뜻이다.
■ 영국은 2015년 범죄화, 미국에선 하와이가 유일하게 형사처벌
법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2015년 통제적·강압적 행동을 범죄로 규정했다.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 코네티컷, 델라웨어, 하와이, 메인, 매사추세츠, 뉴저지, 뉴욕, 버몬트, 워싱턴 등 여러 주가 가정폭력법이나 민사 보호명령, 가사법 체계에서 강압적 통제를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강압적 통제를 인정한 주가 모두 독립된 범죄로 처벌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민사 보호명령이나 이혼·양육권 같은 가사법 절차에서 강압적 통제를 고려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반면 하와이는 최근 미국 전역의 법률 분석에서 강압적 통제 자체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명시한 유일한 주로 꼽힌다. 하와이법은 가족이나 가구 구성원에게 강압적 통제를 행사하는 행위를 ‘petty misdemeanor(경범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하와이 주의회는 2026년 해당 규정의 효력을 2031년 6월까지 연장했다.
미국에서도 "맞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가정폭력 피해가 없었다고 볼 수 없는 법적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셈이다.
■ 패턴을 보기 시작한 법의 새 숙제, "연애 갈등과 학대는 어떻게 구별하나"
법이 '패턴'을 보기 시작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어디까지가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갈등이고, 어디서부터 법적 개입이 필요한 강압적 통제인가라는 질문이다. 연인이 "그 사람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다르다. 가계 지출을 함께 관리하는 것과 상대방이 자기 돈을 전혀 쓸 수 없게 통제하는 것도 같지 않다.
따라서 법원은 단일 행동만 볼 것이 아니라 행동의 지속성과 빈도, 맥락, 그리고 상대방의 자율성을 실제로 얼마나 제한했는지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
심리적 피해가 쟁점인 사건에서는 전문가 증언이 강압적 통제의 작동 방식과 피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전문가 증언이 필요한지, 법정에서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지는 각 지역의 법과 개별 사건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강압적 통제를 법으로 다룬다는 것은 새로운 범죄 하나를 추가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가정폭력을 바라보는 질문 자체를 바꾸는 일에 가깝다. "한 번이라도 때렸는가"에서 "상대방의 삶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지배했는가"로 말이다.
멍은 사라질 수 있고, 때로는 처음부터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무엇을 입고 누구를 만나며 어디에 가고 자신의 돈을 어떻게 쓸지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됐다면, 법은 이제 그 피해를 어떻게 볼 것인지 답해야 한다.
▶ 원문 기사 출처
“The New State Laws Defining Abuse Without a Single Bruise” Ruth S. Johnson, J.D. 2026.10.20. <Psychology Today>.
▶ 원문에서 언급된 연구 출처
- Hilton, N. Z., Eke, A. W., Kim, S., & Ham, E. (2023). Coercive control in police reports of intimate partner violence: Conceptual definition and association with recidivism. Psychology of Violence, 13(4), 277-285.
- Lohmann, S., Cowlishaw, S., Ney, L., O’Donnell, M., & Felmingham, K. (2024). The trauma and mental health impacts of coercive control: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Trauma, Violence, & Abuse, 25(1), 630-647.
김지연(Jee Yearn Kim) Ph.D.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형사정책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법심리연구소 박사후 연구원으로, 생성형 AI 기술 역기능 및 사용자 위험 요인 대응 정책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범죄 행위의 심리학, 범죄자 위험 평가, 교정 개입 원칙, 형사사법 실무자 조직행동, 스토킹 범죄자 개입 등이다.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