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고 사는데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정 폭력 피해자 옭아매는 '트라우마 매커니즘'

[크라임 렌즈]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곳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조건화" 기사입력:2025-09-24 18:12:04
심리학 교과서의 단골 사례인 짐바르도(Zimbardo) 교수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범한 대학생 24명은 무작위로 교도관과 수감자 역할을 맡았다. 신체적 폭력이 금지되었음에도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수감자의 정체성을 지우고 굴욕적 조건을 강요하며 정서를 조작했다. 단 3일 만에 일부 수감자들은 스스로를 "나쁜 수감자"라 여기며 실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리적 구속이 없어도 심리적 조작만으로 인간을 얽매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가정폭력 속 '강압적 통제' 역시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고 맥스 레시아크(Mags Lesiak, MPhil)는 말한다. 가정폭력과 피해자-가해자 간 애착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범죄학자인 레시아크는 <심리학 투데이(Psychology Today)>에 실린 글을 통해 학대받는 이들이 왜 파트너를 떠나지 못하는지 상세히 분석했다.

2001년 독일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기반으로, 참가자들이 간수와 죄수 역할로 나뉘어 권력과 인간 심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준다. 가상의 감옥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폭력, 권력 남용을 중심으로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탐구한 영화다./ 사진= 영화 '엑스페리먼트(2001)' 중 캡처

2001년 독일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기반으로, 참가자들이 간수와 죄수 역할로 나뉘어 권력과 인간 심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준다. 가상의 감옥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폭력, 권력 남용을 중심으로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탐구한 영화다./ 사진= 영화 '엑스페리먼트(2001)' 중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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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압적 통제, 애착을 이용한 지배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의 가해자는 단순히 규칙이나 위협으로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는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 인간관계, 선택지를 재구성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해자의 자율성은 약화되고, 정체성은 재구성되며, 복종은 구조적으로 내면화된다.

레시아크는 "피해자는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믿도록 조건화된다"고 설명한다. 가해자는 단순한 위협을 넘어 피해자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무너뜨리고, 관계와 선택지를 재구성한다. 결국 피해자는 "떠날 수 없는 관계" 속에 갇히게 된다.

강압적 통제는 애착(attachment) 자체를 재구성한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애착이 구속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존 볼비(Bowlby)는 인간이 특히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안전을 위해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강압적 통제의 가해자는 애정과 처벌을 번갈아 제공하는 '간헐적 강화(intermittent reinforcement)'를 통해 혼란과 의존, 정서적 불안을 조성한다. 강압적 통제는 단발적 피해가 아니라 누적되는 과정이며, 피해자는 과정 속에서 자율성을 서서히 잃고 인식을 왜곡당한다.

■ 트라우마 결속, 왜 끊기 힘든가: ① 사회적 조건화와 성역할

연구자들은 학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역설적 애착을 '트라우마 결속(trauma bonding)'이라 부른다. 트라우마 결속은 피해자에게 위협과 간헐적 안도감이 결합해 가해자에게 역설적 애착을 강화하는 구조다. 피해자는 고통 속에서도 간헐적으로 주어지는 애정과 용서를 기다리며 가해자에게 더욱 묶인다.

트라우마 결속은 사회적 조건화(예: 성별 역할 고정관념)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레시아크는 "여성의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보는 사회는 학대를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가부장제는 남성 권위를 자연스럽게 포장하며, 학대를 합리화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가해자는 통제와 고립, 가스라이팅으로 '복종 속의 안전'이라는 허상을 심어 피해자를 붙잡아둔다.

■ 트라우마 결속, 왜 끊기 힘든가: ② 구조적 장벽과 경제적 의존

트라우마 결속은 심리적 문제만이 아니다. 경제적 의존 역시 피해자를 묶어두는 강력한 족쇄다. 경제적으로 가해자에게 의존하는 여성은 독립적 생존의 선택지가 제한된다. 낮은 임금, 직업 차별, 돌봄 노동의 저평가는 여성들이 학대 관계를 벗어날 선택지를 차단한다. 가해자는 재정·거주·고용을 통제해 피해자의 생존 자체를 장악한다.

또한 가해자는 피해자를 가족·지인으로부터 고립시켜 유일한 정서적 지주로 자리 잡는다. 심리적 조작과 경제적 통제라는 이중 구속은 피해자가 탈출을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 가해자가 만드는 결속의 덫

트라우마 결속은 수동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트라우마 결속은 가해자가 심리적 조작, 통제 전략, 구조적 의존 강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설계·유지하는 전략이다. 강압적 통제는 단순한 폭력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지배 체계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정체성과 자아 인식을 조작하여 피해자를 비인간화하고 모욕하면서도, 동시에 유일한 보호자이자 인정의 원천으로 자신을 위치시킨다. 피해자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 저항 대신 애착을 강화하며 인지 부조화를 해결하려 한다.

결국 피해자는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며, 고통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떠안게 된다. 학대 관계 속 피해자의 반응은 단순한 심리적 결과가 아니라, 강압적 통제를 위한 가해자의 의도적 전략인 것이다.

■ 피해자는 "사랑"이 아니라 조건반사임을 깨달아야

강압적 통제는 단순히 행동을 지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인식을 지배하고, 애착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피해자가 느끼는 "사랑"은 자유롭게 주어진 감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감정은 구조적 압박 속에서 지배와 복종을 돌봄으로 착각하게끔 길러진 조건반사적 반응이다.

레시아크는 "트라우마 결속을 끊으려면 먼저 '지배가 돌봄이라는 환상'을 깨야 한다"고 강조한다. 트라우마 결속을 끊는 일은 임상적·문화적·정치적 차원의 과제다. 강압적 통제를 정확히 이름 붙이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김지연(Jee Yearn Kim) Ph.D.

독립 연구자로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 형사정책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관심 분야는 범죄 행위의 심리학(Psychology of Criminal Conduct), 범죄자 분류 위험 평가(Offender Classification and Risk Assessment), 효과적인 교정개입의 원칙(Principles of Effective Intervention), 형사사법 실무자의 직장내 스트레스 요인, 인력 유지 조직행동(Workplace Stressors, Retention, and Organizational Behavior of Criminal Justice Practitioners), 스토킹 범죄자 개입 방법(Stalking Offenders and Interventions)이다.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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