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살생각은 건강 문제, 경제적 어려움, 관계 단절 등 개인·가족적 요인과 밀접하다. 저소득층, 장애인, 이혼·별거 경험자, 사회적 지지가 약한 집단일수록 위험이 크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울과 스트레스 같은 심리적 요인이 직접적 원인이라면, 그 배경에는 아노미(무규범), 사회적 불평등, 차별과 갈등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자리한다.
정진성 교수(순천향대)와 심희섭 교수(한남대)는 <형사정책연구>에 발표한 '자살생각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탐색적 연구: 성별 및 연령대별 비교 검증' 논문에서 구조적 요인의 영향력을 분석했다. 두 연구자는 전국 성인 3,839명을 대상으로 개인·심리·사회 요인이 자살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 성별·연령대별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검증했다. 특히 기존 연구가 주로 개인 심리에 집중했던 한계를 넘어, 사회적 상황 요인이 독립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색했다.

정진성·심희섭(순천향대·한남대) 2024년 연구에 따르면 자살생각 경험률이 기초급여 수급자 26.2%, 장애인 19.8%로 일반인보다 4~5배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자살을 개인 심리 문제로만 접근하는 한계를 지적하며 아노미, 차별·갈등 인식 등 사회적 구조 요인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이미지 디자인=로이슈 AI 디자인팀
이미지 확대보기■ 노년층·저소득층·장애인, 더 높은 위험
응답자 중 지난 1년간 자살생각을 경험한 사람은 5.9%였다. 남성은 5.3%, 여성은 6.5%였으며, 연령별로는 청년층(19~39세) 4.5%, 중장년층(40~64세) 5.7%, 노년층(65세 이상) 9.9%로 연령이 높아질수록 비율도 증가했다. 특히 노년층은 청년층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기초급여 수급자의 자살생각 비율은 26.2%로, 비수급자의 4.9%보다 5배 이상 높았다. 장애인의 경우 자살생각 경험률이 19.8%로 비장애인의 5.2%보다 약 4배 높았다. 이혼·별거 경험자, 1인가구 역시 자살생각 비율이 일반인보다 2~3배 높았다.
■ 아노미, 차별, 불공정… 사회적 요인의 그림자
분석 결과, 나쁜 건강 상태, 약한 사회적 지지, 우울, 스트레스는 공통적으로 자살생각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사회적 요인도 강력했다. 전체 표본에서는 아노미 인식과 차별·갈등 인식이 자살생각을 증가시키는 뚜렷한 위험 요인으로 확인됐다. 반면 분배·절차 불공정 인식은 유의미하지 않았다.
성별 분석에서는 남성의 경우 아노미 인식과 차별·갈등 인식이 주요 요인이었고, 여성은 아노미 인식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특히 여성에게 아노미 인식은 우울 못지않게 강력한 위험 요인으로, 자살생각 확률을 3배 이상 높였다. 개인 요인에서는 나쁜 건강 상태, 약한 사회적 지지, 우울이 남녀 모두에게 대표적인 유발요인이었으며, 남성에게는 스트레스가 추가적인 유발요인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중장년층에서 아노미 인식과 차별·갈등 인식이 영향을 미쳤다. 청년층은 전체 사회적 요인에는 둔감했지만, 분배 불공정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민감했다. 노력해도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인식이 자살생각을 급증시킨 것이다. 노년층은 여성 집단과 유사하게 아노미 인식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 단순한 위기 개입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회복 필요
연구 결과는 자살을 단순히 개인의 우울이나 충동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연구진은 "한국은 전통적으로 공동체 연대를 중시하지만, 과도한 경쟁과 비교 문화가 맞물리면서 소외와 불공정 경험이 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자살 예방은 단순 위기 개입을 넘어 사회적 구조의 회복과 개선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연구진은 구체적으로 불평등 완화와 지속적 경제 지원, 정부와 지도층의 규범 준수와 솔선수범, 세대·성별 집단별 맞춤형 예방 전략을 강조했다.
① 여성과 노년층 ― 사회적 단절감, '아노미'의 무게
여성과 노년층은 공통적으로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감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공동체 연대가 약화됐다는 경험 자체가 강력한 위험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여성과 노년층에서 아노미 인식은 우울 못지않게 자살생각을 높이는 요인이었다. 사회적 소속감의 상실은 단순히 개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지탱하던 기반을 무너뜨린다.
여성과 노년층의 자살 예방은 단순한 심리 상담을 넘어, 공동체적 연대와 사회적 신뢰 회복을 통한 사회 구조 차원의 접근이 필수적이다. 공무원과 지도층이 솔선수범하여 규범을 준수하고, 시민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회적 지지를 되살리는 출발점이다.
② 남성과 중장년층 ― 차별·갈등 경험이 자존심을 무너뜨릴 때
남성과 중장년층에서는 차별·갈등 인식이 주요 변인으로 드러났다. 정치·경제 현안에 대한 관심이 높고, 사회적 역할을 "존중받아야 할 위치"로 인식한다. 따라서 사회가 불공정하고 갈등적이라고 느낄 때, 그 감각은 곧 무력감과 좌절로 이어진다.
남성과 중장년층에서 차별과 갈등 인식은 주요한 자살생각 유발 요인으로 확인됐으므로, 갈등을 완화하고 공정성을 회복하는 정책적 대응이 절실하다. 사회적 포용성을 높이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③ 청년층 ― 분배 불공정, "노력해도 보상이 없다"는 절망
청년층은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분배의 불공정'만큼은 예외였다. 연구 결과, 노력해도 정당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인식은 청년의 자살생각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청년층이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어려움이 불공정의 결과라고 여길 때 더욱 큰 절망을 느낀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청년 자살 예방은 단순한 일회성 지원으로는 부족하다. 청년이 사회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종합적 기반을 마련하고, 구조적 불평등과 세습적 격차를 완화하는 근본적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청년 정책이 삶 전반을 아우르는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법·제도의 개선뿐 아니라, 차별과 갈등, 불평등의 고착화를 해결하는 사회적 변화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연구진은 강조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생존의 안전망을 넘어, 공정한 기회와 미래에 대한 신뢰다.
결국 자살 예방은 상담실 안의 심리치료에만 머무를 수 없다. 불평등 완화, 제도적 신뢰 회복, 공동체적 연대 강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는 비극적 이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연구논문
정진성·심희섭(2024). 자살생각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탐색적 연구: 성별 및 연령대별 비교 검증. 형사정책연구, 35(3), 59-98.
김지연(Jee Yearn Kim) Ph.D. 독립 연구자로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 형사정책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및 관심 분야는 범죄 행위의 심리학(Psychology of Criminal Conduct), 범죄자 분류 및 위험 평가(Offender Classification and Risk Assessment), 효과적인 교정개입의 원칙(Principles of Effective Intervention), 형사사법 실무자의 직장내 스트레스 요인, 인력 유지 및 조직행동(Workplace Stressors, Retention, and Organizational Behavior of Criminal Justice Practitioners), 스토킹 범죄자 및 개입 방법(Stalking Offenders and Interventions)이다.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