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잃은 피해자가 사기꾼을 변호하는 이유

[크라임 렌즈] 테라노스·FTX·니콜라 모두 유죄 판결 뒤에도 지지자 남아... 속았다고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믿어온 자신까지 부정해야 하기 때문 기사입력:2026-07-25 23:03:23
미국의 혈액검사 스타트업 테라노스(Theranos)를 세운 엘리자베스 홈즈(Elizabeth Holmes)의 사기 행각이 드러났을 때, 홈즈를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곧바로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일부 지지자는 홈즈가 아니라 언론과 규제기관, 기술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은 회의론자들을 탓했다.

테라노스는 손가락 끝에서 뽑은 피 몇 방울로 250여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내세워 투자금 9억4500만 달러를 끌어모은 회사다. 2003년 스탠퍼드대를 중퇴하고 열아홉에 회사를 세운 홈즈는 '여자 스티브 잡스'로 불렸지만, 기술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2015년 폭로되면서 테라노스는 2018년 문을 닫았다.

홈즈는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023년 5월 텍사스주 연방 여성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러고도 세상이 조금만 더 믿어줬다면 기술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취지의 말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뉴스쿨(The New School) 경영학 명예교수이자 최고경영자와 경영진, 이사회를 상대로 40년 넘게 자문해 온 컨설턴트 마크 립턴(Mark Lipton) 박사는 "유능한 사기꾼은 돈만 빼앗지 않는다. 피해자가 자신을 속인 사람을 스스로 변호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립턴 박사는 <사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 기고문 '왜 우리는 자신을 속인 사람들을 변호하는가(Why We Defend the People Who Con Us)'에서 사기와 기만이 거짓말의 차원을 넘어 단단한 믿음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뜯어봤다.

사기의 위력은 피해 금액으로 재는 게 아니다. 립턴 박사는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피해자의 믿음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뉴스쿨 경영학 명예교수 마크 립턴 박사가 &lt;사이콜로지 투데이&gt;(2026)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사기의 위력은 피해 금액이 아니라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피해자의 믿음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립턴 박사는 사기꾼이 권위와 다수의 지지, 정체성을 이용해 피해자를 '신봉자'로 바꿔놓는다며, 자신은 절대 속지 않는다는 확신부터 점검하는 태도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사진=엘리자베스 홈즈, 사진출처=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뉴스쿨 경영학 명예교수 마크 립턴 박사가 <사이콜로지 투데이>(2026)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사기의 위력은 피해 금액이 아니라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피해자의 믿음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립턴 박사는 사기꾼이 권위와 다수의 지지, 정체성을 이용해 피해자를 '신봉자'로 바꿔놓는다며, 자신은 절대 속지 않는다는 확신부터 점검하는 태도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사진=엘리자베스 홈즈, 사진출처=AP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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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한 사기의 진짜 목표, "피해자를 신봉자로 바꿔놓는다"

립턴 박사는 정교한 사기의 핵심이 피해자의 판단을 흐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피해자가 사기꾼의 주장과 명분을 스스로 나서서 감싸게 만드는 단계까지 가야 사기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허술한 사기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무너진다. 정교한 사기는 다르다. 홈즈의 사례처럼 유죄 판결이 나온 뒤에도 지지자를 붙잡아 둔다. 일부 피해자는 평생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도 한다. 따져야 할 질문은 사기의 규모가 아니다.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한 뒤에도 무엇이 믿음을 붙들어 두느냐다.

■ 메이도프에 속은 은행과 자선단체, 문제는 지능이 아니라 "누구를 믿기로 했는가"

버니 메이도프(Bernie Madoff)가 장부상 약 650억 달러 규모의 폰지 사기를 자백했을 때 투자자들의 믿음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폰지 사기의 구조는 간단하다. 투자금이 남아 있거나, 남아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메이도프의 계좌에는 돈이 없었다. 자백 이후에는 믿음을 붙들 근거 자체가 사라졌다.

메이도프에게 속은 사람들은 금융 지식이 부족한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피해자 명단에는 은행과 자선단체, 철저한 투자 실사를 자부하던 금융 전문가들이 올라 있었다.

미국 보스턴대 로스쿨 교수로 폰지 사기 수백 건을 분석한 타마르 프랭켈(Tamar Frankel)은 많은 피해자에게 공통된 심리 조합이 있다고 봤다. 제도권과 기존 권위는 의심하면서도, 자기가 믿고 싶은 이야기를 확인해 주는 '대안적 정보원'은 별다른 검증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사기에 빠지는 원인은 머리가 좋고 나쁨보다 어떤 권위를 믿기로 선택했느냐와 더 가깝다.

자기 판단력을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더 쉽게 걸려들기도 한다. 사기꾼은 상대가 제도권을 의심하는 태도를 지적인 통찰처럼 치켜세운 뒤, 소수만 안다는 '은밀한 진실'을 건넨다.

사회심리학자 롤란트 임호프(Roland Imhoff)는 남들은 모르는 지식을 손에 쥐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고 싶어 하는 심리를 '독특성 욕구(need for uniqueness)'라고 부른다. 사기꾼은 그 욕구를 겨냥해 "당신은 공식 발표를 그대로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거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계시처럼 포장된 아첨인 셈이다.

■ 화려한 경력과 유명인 지지, 사기꾼이 빌려 쓰는 두 가지 무기

숙련된 사기꾼의 설득은 즉흥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Cialdini)의 설득·영향력 연구에 비춰 보면 순서가 있다. 사기꾼은 먼저 화려한 경력과 사회적 명분을 앞세워 권위를 빌린다. 다음으로 유명 인사나 존경받는 인물의 지지를 끌어와 사회적 합의가 이미 형성된 것처럼 연출한다. 지지자가 일정 규모를 넘어서면 의심하는 쪽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전직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은 암을 이겨낸 영웅 서사와 자선재단, 노란 고무팔찌 캠페인으로 도덕적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암스트롱을 둘러싼 후광 탓에 도핑 의혹은 오랫동안 영웅을 흠집 내려는 음해처럼 받아들여졌다.

암스트롱은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진실을 폭로한 사람들을 상대로는 소송까지 걸었다. 2013년 도핑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일부 팬은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프레임이 이성적 판단보다 도덕적 직관을 먼저 건드린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사실관계를 따지기 전에 누가 옳은 편인지부터 느낀다는 얘기다. 사기꾼이 권위와 명분, 집단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이유도 믿음이 현실과 부딪히는 시점을 최대한 뒤로 미루기 위해서다.

■ 매몰비용에 정체성까지 얹히면... 믿음을 버리는 순간 "내가 부정된다"

한번 자리 잡은 믿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원인이 '매몰비용 오류(sunk-cost fallacy)'다. 이미 쏟아부은 돈과 시간, 감정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심리다.

믿음이 개인의 정체성과 붙어버리면 포기는 훨씬 어려워진다.

가상자산 거래소 FTX 고객 자금 80억 달러를 빼돌린 혐의로 징역 25년을 선고받은 샘 뱅크먼-프리드(Sam Bankman-Fried)의 재판에서도 일부 지지자는 뱅크먼-프리드의 이타적인 성품을 칭찬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냈다. 범죄 혐의와 책임을 따지는 자리를 피고인의 선한 이미지로 덮으려 한 셈이다.

전기·수소트럭 기업 니콜라(Nikola)를 창업한 트레버 밀턴(Trevor Milton)은 작동하지 않는 시제품 트럭을 언덕 아래로 굴린 뒤 스스로 달리는 것처럼 연출한 홍보영상 등으로 투자자를 속인 혐의로 2022년 유죄 평결을 받았다. 이듬해 12월 1심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됐고, 2025년 3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전면 사면으로 형 집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유죄 평결이 나온 뒤에도 일부 개인 투자자는 밀턴이 결백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치심리학자 릴리아나 메이슨(Lilliana Mason)은 신념이 정체성과 결합하면 사실이 더 이상 모두가 공유하는 현실로 기능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소유물처럼 변한다고 설명한다. 믿음을 내려놓는 일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 틀린 믿음도 계속 살아남는다.

■ 믿음이 의존으로 바뀌는 순간... 증거조차 "구원자를 향한 공격"으로

립턴 박사는 독성 리더십을 연구하다가 정신분석학자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의 이론과 맞닿는 패턴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문제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지도자가 자신들을 위협에서 구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비온은 그런 집단을 '의존 집단(dependency group)'이라고 불렀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집단이 두려워하는 위협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그 지도자다.

자기계발단체 NXIVM을 세운 키스 라니어(Keith Raniere)는 조직을 개인 성장과 경영자 교육 프로그램으로 홍보했다. 실체는 달랐다. 라니어는 조직범죄와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 아동 성착취물 소지 등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020년 10월 징역 120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도 일부 구성원은 법원 앞에서 라니어를 계속 옹호했다.

믿음이 의존으로 바뀌면 범죄를 입증하는 증거조차 '구원자를 향한 공격'으로 읽힌다. 집단을 떠나려면 오랫동안 믿고 따랐던 자신의 과거까지 잘못이었다고 인정해야 한다. 의존을 만들어낸 사기가 가장 오래 버티는 이유다.

■ 상실감과 고립이 만든 빈틈... "원인을 지목해 주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기에 유독 취약해지는 환경도 있다. 사회학자 알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의 연구를 보면, 사회적 지위나 정당한 몫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사람은 상실의 원인을 또렷하게 지목해 주는 인물에게 끌리기 쉽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의 사회적 자본 연구는 고립된 사람이 왜 더 위험한지 보여준다. 현실의 인간관계가 얇아질수록 세상을 해석하는 정보를 온라인 플랫폼과 추천 알고리즘에 기대게 되기 때문이다.

■ 테라노스 이사회의 전직 장관과 장성들... "표적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판단을 비틀어 놓는 인지 편향이 일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결함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사고 방식 자체에 처음부터 내장돼 있다는 것이다.

테라노스 이사회 명단이 그 증거다.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 예비역 장군 등이 이름을 올렸다. 화려한 경력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들도 기만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사기 피해자는 따로 구별되는 부류가 아니다. 누구든 사실이 더 이상 믿음을 받쳐주지 않는데도 기존 판단을 붙잡을 수 있다. 끝까지 놓지 못하는 대상은 주식이나 회사일 수도 있고, 반드시 옳다고 믿고 싶었던 상사나 특정 인물일 수도 있다.

립턴 박사는 사기의 위력을 현실과 맞닥뜨린 뒤에도 믿음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로 가늠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증거가 더 이상 뒷받침하지 않는데도 내가 여전히 믿음만으로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립턴 박사는 "나는 절대 사기를 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야말로 이미 사실 확인을 멈춘 사람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원문 기사 출처
"Why We Defend the People Who Con Us" Mark Lipton, Ph.D. 2026.07.16. <Psychology Today>.

김지연(Jee Yearn Kim) Ph.D.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형사정책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법심리연구소 박사후 연구원으로, 생성형 AI 기술 역기능 및 사용자 위험 요인 대응 정책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범죄 행위의 심리학, 범죄자 위험 평가, 교정 개입 원칙, 형사사법 실무자 조직행동, 스토킹 범죄자 개입 등이다.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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