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끝난 일?" 아니다…트라우마는 여전히 현재형
- 수치심에 숨긴 트라우마, 말하는 순간 치유 시작
과거의 학대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는 해소되지 않으면 오래도록 남아 삶을 흔들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를 직접 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 많은 학대 피해자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베벌리 엥겔(Beverly Engel)은 35년 동안 학대와 트라우마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뤄온 가족 상담 전문 치료사이다. 지금까지 학대, 수치심, 회복·역량 강화(empowerment)와 관련된 주제로 25권 넘는 자기계발서를 집필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마침내 자유로: 어린 시절 성학대의 수치심 치유하기(Freedom at Last: Healing the Shame of Childhood Sexual Abuse)>, <정서적 학대에서 벗어나기(Escaping Emotional Abuse)>, <감정적 자아 치유하기(Healing Your Emotional Self)> 등이 있다.
엥겔은 <사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에서 “과거의 학대 경험을 말하는 것이 남겨진 감정적 과제를 해결하고, 과거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저서 <과거는 과거에 머물게 하라(Put Your Past in the Past)>에 소개한 ‘트라우마를 과거로 돌려놓는 방식들’을 통해 학대 피해자들이 남겨진 감정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자세히 살펴본다.

Beverly Engel 가족 상담 전문 치료사(2025)에 따르면 과거 학대 트라우마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수치심을 줄이고 인간관계를 깊게 만드는 강력한 치유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트라우마를 비밀로 감추면 곪아가는 상처처럼 남지만, 신뢰하는 사람에게 털어놓을 때 치유가 시작된다"며 침묵이 아닌 '말하기'를 통한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미지 디자인=로이슈 AI 디자인팀(*본 이미지는 기사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것입니다.)
이미지 확대보기엥겔은 학대 피해자가 무의식적으로 학대적 파트너를 선택하거나 스스로 학대자가 되는 ‘재현 행동’을 반복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직접 말하지 못한 과거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려는 ‘은밀한 도움 요청(covert cry for help)’일 수 있다. 엥겔은 그 외침을 숨기기보다 차라리 겉으로 드러내어(overt) 도움을 구하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일기 쓰기 등 감정 해소 도구도 효과적이지만, 누군가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훨씬 큰 치유 효과를 준다고 강조한다.
엥겔은 학대 피해자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낮게 평가받거나 ‘망가졌다’고 볼까 두려워서: 특히 어린 시절 성학대 피해자들의 공통된 두려움이다. “파트너(또는 친구)가 더 이상 나를 같은 시선으로 보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내담자도 많다.
- 불쌍하게 보일까 두려워서: 특히 남성들은 약하거나 무력해 보일까 두려워 어떤 형태의 피해 경험도 인정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 비난받거나, 믿어주지 않을까 두려워서: 이는 특히 어린 시절 학대—특히 성학대—의 피해자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끔찍한 이야기를 듣기 어려워 피해자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이유를 찾으려 한다. 피해자를 탓하는 것은 그 회피 전략 중 가장 쉬운 방법이다. “왜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냐”는 판단도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든다.
- 통제력을 잃을까 두려워서: 피해자는 학대당했던 당시 아무런 힘도 없었다는 무력감을 경험했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은 그 통제를 내려놓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 취약해지는 것이 두려워서: 학대 경험을 말하는 것은 극도로 취약해지는 일이다. 특히 남성이 가장 어려워하지만, 누구든지 고통·두려움·수치심으로 구축한 자기만의 ‘방어막’을 내려놓기 어렵다.
- 누구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정서적 신뢰가 무너진 피해자들은 털어놓는 행위 자체가 ‘위험’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아직 그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 부모의 방임, 학대, 혹은 버림을 경험한 사람들은 공포, 수치심, 타인을 보호하려는 죄책감 등으로 더욱 말을 꺼린다. 침묵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피해자 자신에게 상처를 깊게 남긴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적응을 위해 가장 취약한 감정을 ‘차단(shutdown)’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람일수록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큰 치유 효과를 얻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방어막을 내려놓고,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과 다시 연결되기 때문이며, 바로 이 과정이 강한 치유력을 갖는다.
많은 피해자는 “이미 끝난 일”, “과거는 과거다”라고 자신을 설득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거가 끝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들은 여전히 플래시백(갑작스러운 기억 재현)과 악몽을 겪고,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작은 자극에도 반복적으로 고통받고, 학대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거나, 위험한 상황에 반복적으로 빠져든다. 트라우마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한다.
■ '트라우마 말하기'의 7가지 치유 효과
트라우마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을 회피하려 하면 할수록, 트라우마는 피해자를 계속 따라다니고 괴롭힐 수 있다. 엥겔은 트라우마를 털어놓는 것이 다음과 같은 긍정적 효과를 낳는다고 설명한다.
①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순간, 그 무거운 짐을 더 이상 혼자만 짊어질 필요가 없어진다.
② 감정적 해소(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트라우마와 연결된 감정을 억누르게 된다. 그 기억은 곪아가는 상처처럼 남을 수 있다.
③ 기억과 관련된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트라우마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그 기억에 대한 고통이 줄어들고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④ 치유를 시작하게 해준다: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 기억의 힘이 약해지며 이미 그 사건을 생존해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전히 떠올리면 아프지만, 그 경험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그 일은 일어났지만, 이제 끝난 일이다.
⑤ 수치심을 줄여준다: 트라우마를 비밀로 감추는 것은, 무언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신호를 스스로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비난이 아니라 지지와 공감을 받는다면, 그것이 ‘숨겨야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⑥ 더 강해졌다는 느낌을 준다: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그 이야기를 직접 말하는 것은 학대 피해자에게 “나는 무엇이든 마주할 수 있다”는 감각을 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며, 그 용기를 확인하는 과정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⑦ 인간관계를 더 깊게 만든다: 친한 친구, 파트너, 가족 등에게 트라우마 이야기를 나누면 그 관계는 한층 더 깊어진다. 당신의 이야기를 신뢰하는 사람은 당신과 더 가까워졌다고 느끼며, 당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 정서적 건강을 위한 필수 과정... “과거를 말할 수 있어야 과거가 된다”
어린 시절 학대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매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서적 건강과 웰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엥겔은 말한다.
어린 시절 학대는 시간이 지나도 자연스럽게 치유되지 않는 심각한 심리적 상처를 남긴다. 부정하거나 방치하고 숨길수록 이 상처는 더욱 깊이 곪아가며, 신체적·심리적·관계적 증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릴 적 학대 경험을 누군가에게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보라. 치유는 침묵이 아닌 ‘말하기’에서 시작된다.”고 엥겔은 말한다.
모든 학대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음으로써 비로소 회복의 길에 들어서길 바란다.
▶ 원문 기사 출처
“Why It Is Important to Tell Someone About Your Past Abuse,” Beverly Engel, L.M.F.T., 2025.11.07. <Psychology Today>.
김지연(Jee Yearn Kim) Ph.D.
독립 연구자로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 형사정책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및 관심 분야는 범죄 행위의 심리학(Psychology of Criminal Conduct), 범죄자 분류 및 위험 평가(Offender Classification and Risk Assessment), 효과적인 교정개입의 원칙(Principles of Effective Intervention), 형사사법 실무자의 직장내 스트레스 요인, 인력 유지 및 조직행동(Workplace Stressors, Retention, and Organizational Behavior of Criminal Justice Practitioners), 스토킹 범죄자 및 개입 방법(Stalking Offenders and Interventions)이다.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