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한국판 드레퓌스 ‘유서대필’ 강기훈 24년만 재심 누명 벗어

경찰 “검찰이 유서대필로 결론 내리고 불리한 증거 배척하는 등 무리한 수사 의심” 기사입력:2015-05-14 11:41:00
[로이슈=신종철 기자]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강기훈씨가 무려 24년 만에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제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4일 “피고인 강기훈은 김기설 명의의 유서 2장을 작성해 줌으로써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자살방조 혐의 공소사실에 대한 재심사건(2014도2946)에서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국과수 감정인 김OO이 허위 증언을 한 점 등을 비롯해 김OO이 작성한 감정서 중 이 사건 유서와 피고인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부분은 그대로 믿기 어렵고,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유서를 대필해 줘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자살방조의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서울서초동대법원청사

▲서울서초동대법원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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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이렇다.

김기설씨는 1991년 5월 9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학교 본관 5층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해 사망했다. 그런데 김기설씨가 옥상에 벗어 놓은 양복 상의에서 유서 2장이 발견됐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는 1991년 7월 12일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해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했다. 또 강기훈씨는 이적단체에 가입하고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혐의도 추가됐다.

강기훈씨는 1991년 4월 27일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 아닙니다. …(이하 생략)… -김기설-”이라는 내용의 유서 1장과 5월 8일 “아버지, 어머니 어버이 날입니다. 오늘 이 행위를 일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하 생략) … -기설-”이라는 내용의 유서 1장을 작성해 줬다는 소위 유서대필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강기훈씨가 이렇게 김기설의 분신자살을 조국과 민중을 위한 행위로 미화해 김기설로 하여금 분신자살의 결의를 확실하게 함과 동시에 이후 장례의식 등 모든 문제를 전민련과 소위 강경대 사건 대책위에서 책임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김기설의 분신자살 결심과 결행으로 용이하게 도와줘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했다.

이로 인해 강기훈씨는 1심은 물론 1992년 4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자살방조죄와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받고, 그해 7월 판결이 확정돼 복역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결과가 유죄 판결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는 경찰이 뒤늦게나마 재심으로 가는 첫 단추의 역할을 했다.

경찰청은 2004년 11월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를 발족시키고, 2005년 3월 회의에서 해방 후 발생한 10대 의혹 사건을 조사대상 사건으로 확정하고 그 중 하나인 소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에 관해 조사활동을 전개했다.

조사활동을 거친 경찰청은 2005년 12월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로 봐 유서는 김기설의 필체로 보이고, 1심에서 증거로 제출됐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필적감정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감정이 아니었다는 의문이 있다. 검찰이 미리 유서 대필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불리한 증거를 배척하는 등 무리한 수사를 한 것이라 의심되는 부분이 있으나, 유서 원본에 대한 필적감정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판단된다’라는 내용으로 과거사 진상규명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진실ㆍ화해위원회가 강기훈씨의 진실규명신청을 받고 조사를 거쳐 2007년 11월 필적감정결과 등을 기초로 강기훈씨가 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볼 수 없고, 경험칙상 타인의 유서를 대필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임에 비춰 김기설이 자신의 유서를 작성했다고 볼 수 있음에도 검찰이 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한 것은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에 위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위원회는 “국가는 확정판결에 대해 피해자(강기훈)와 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고, 종전 국과수의 필적감정, 기소 및 유죄판결에 대해 피해자와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이후 강기훈씨는 2008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 자살방조 혐의 즉 ‘유서대필 사건’에 관해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 9월 15일 재심사유가 있다고 인정해 재심개시결정을 했다.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 제10형사부(재판장 권기훈 부장판사)는 2014년 2월 13일 유서대필 사건 ‘자살방조’ 공소사실에 대해 강기훈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기설씨의 분신 사망 후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해 자살을 도왔다는 자살방조 혐의를 받은 지 23년만이었다. 또 2009년 서울고법 재심개시결정 이후 5년 가까이 지나 무죄 판결이 났다.

재판부는 “한글은 문자 형태가 단조롭고 쓰기가 쉬워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인 유사성이 상당 부분 나타나는 특징이 있으므로, 그와 같은 특징들을 근거로 감정문서와 대조자료의 필적 이동성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그 특징들이 다소 희소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필적에 일관되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항상성이 있는 특징들이야 하는데, 국과수 감정서에서 이 사건 유서와 피고인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특징들 중 일부는 항상성 있는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국과수 감정인 김OO은 1991년 5월 29일자 및 7월 4일자 감정서에서 피고인(강기훈)의 화학노트 필적도 유서의 필적과 동일하다고 감정했다. 하지만 2007년 8월 8일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김OO은 ‘피고인의 화학노트의 경우 유서와 동일 필적의 특징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웠고, 유서와 단순하게 비교하면 상이한 점이 많았다고’고 진술한 바꾼 점에 주목했다.

또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소속돼 있던 다른 문서감정인들이 필적감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음에도, 김OO은 제1심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당시 국과수에 재직 중이던 감정인 4명 모두 직접 감정에 참여해 공동심의를 한 것처럼 허위 증언을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국과수 감정인 김OO이 작성한 감정서 중 유서의 필적과 피고인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부분과 유서의 필적과 김기설의 필적이 상이하다는 부분은 신빙성이 없어 그대로 믿기 어렵고,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김기설에게 유서를 대필해 줘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이 없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할 정도로 입증됐다고 보기에 부족하다”며 “결국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당시 무죄 판결에는 법무법인 덕수의 이석태ㆍ송상교ㆍ윤천우 변호사, 백승헌 변호사, 법무법인 정평의 박연철ㆍ정양현ㆍ이주언 변호사, 박주민 변호사(법무법인 한결)가 참여했다.

이렇게 무죄 판결이 나자, 검찰이 상고했으나, 대법원 재판부가 이날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며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씨에 대한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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