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 결과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가 “1심 법원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이 상식에 기초해 적정한 양형을 정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배심원 평결을 존중해 주목받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법원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면서, 특히 국민참여재판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 배심원들의 평결을 왜 존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 사건 개요
충북 영동군에 사는 전OO(28)씨는 정신지체 3급 장애인으로 별다른 직업도 없고 또래 친구도 없이 지내오던 중 5년 전 이웃마을 주민인 손OO(83)씨를 알게 됐다.
손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술에 취하면 옷에 변을 봐 악취를 풍겨 이웃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왔지만, 전씨에게만은 유일한 말동무가 돼 주었기 때문에 서로 술친구가 돼 잦은 술자리를 해 왔다.
그런데 손씨는 술에 취하면 2002년 태풍 ‘루사’때 수해로 죽은 마을 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전씨는 반복되는 이야기에 싫증을 느껴 “똑같은 이야기를 그만 하라”고 매번 요구했지만 말을 듣지 않아 종종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다. 이에 전씨는 불만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13일 일이 터지고 말았다. 손씨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전씨는 또 죽은 이웃에 대해 반복해 말하는 손씨에게 짜증을 느꼈다.
이에 전씨는 수 차례 “그만 하라”고 요구했으나, 손씨가 멈추지 않고 계속 반복하자 격분해 손씨를 밀어 넘어뜨리고 배 위에 올라 타 목을 조르다가 주방에 있던 흉기를 갖고 와 복부를 찔러 숨지게 했다.
결국 전씨는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지난 2월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청주지법 제21형사부(재판장 오준근 부장판사)는 배심원들의 평결을 받아들여 징역 6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징역 10년을 구형했었다.
이에 검사는 “형량이 너무 가벼워서 부당하다”며, 전씨는 심신미약 등을 이유로 “형량이 너무 무거워서 부당하다”며 각각 항소했다.
이에 대해 대전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김상준 부장판사)는 지난 28일 “배심원들의 평결을 존중한다”면서 1심과 같이 징역 6년을 선고하고, 또 치료와 재범의 위험성을 들어 치료감호를 추가로 선고했다.
치료감호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인은 경도의 정신지체로 인해 지능저하, 충동조절능력저하, 현실 판단력의 장애 등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것이며, 이 같은 정신지체로 인해 재범의 위험성이 높은 점, 스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점 등을 종합하면 치료의 필요성 및 재범의 위험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 배심원 의견 존중 필요성 강조
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에 의한 1심 배심원 권고의견(평결)과 관련해 견해를 밝혀 눈길을 끌었다.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하는 것이나, 그것이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의 한 국가권력인 이상, 그 기반은 여전히 국민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상기시킨 것.
다시 말해 국민참여재판과 같이 국민을 능동적 사법권력 행사에 조금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헌법의 근본이념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어 현대 문명국가의 사법제도가 이 땅에 정착하게 된 이 시점에 이르러 우리 제도 및 전문가들의 역량은 시민의 사법참여를 능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신장, 다양한 가치관의 수용에 관한 관용심의 증대, 변화에 대한 발 빠른 적응능력과 역동성, 공익참여에 대한 열망의 고양 등에 힘입어 시민 개개인의 역량 또한 사회 공동체의 문제를 재판의 장에서 감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숙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국민의 사법참여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된 결과 ‘국민의 형사재판참여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올해 1월부터 국민참여재판이 시행되기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국민참여재판은 사법권에 대한 직접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국민의 상식과 경험을 재판절차와 결과에 반영해 사법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높여 사법신뢰를 증진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며 “이제 이웃의 법률문제를 주인 된 입장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된 대한민국 국민은 명실상부한 주권자의 지위를 회복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 1심 법원 오류 질타…똑똑한 배심원 판단 대단해
재판부는 “법원은 그 심급을 불문하고 배심원들의 건전한 상식과 합리적인 판단에 기초한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1심 재판부의 심리미진 잘못을 크게 질타했다.
재판부는 “무엇보다 1심 법원은 재판결과가 상급심에서 무산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며 “상급심도 배심원 판단 존중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은 두말한 나위가 없되, 국민참여재판의 적정한 운영을 조력하기 위해 혹여 생길 수 있는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지도적 엄정심사를 다할 책무를 부담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피고인의 변호인은 1심에서 필요적 형감경사유인 심신미약을 주장했으나, 1심 법원은 정신감정 등 피고인의 심신미약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증거조사결과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로 인해 피고인의 심신미약 여부에 대한 배심원들의 판단도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배심원들은 살인죄에 대해 징역 5년부터 7년6월의 양형 의견을 제시했고, 그 중 징역 6년의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와 관련, 재판부는 “이런 양형 의견은 전씨의 범행과 유사한 유형의 살인죄에 대한 통상의 양형 사례에 비춰 보면 다소 가벼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법정에서 피고인의 동태를 직접 목격하고 그 상태를 파악한 배심원들이 사실상 피고인의 심신미약을 인정하고 이를 작량감경 사유로 적극 반영한 결과일 것”이라고 배심원들의 판단에 깊은 속뜻이 있다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이처럼 1심 판결에는 피고인에 대해 심신미약 심사를 다하지 못하고 형량을 정한 잘못이 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배심원들의 양형 판단에 있어 법논리적 차질을 빚게 했다”고 1심 재판부를 강도 높게 질타했다.
피고인에게 유기징역형을 선택하고 심신미약 감경을 하는 경우 그 처단형의 범위는 징역 2년6월에서 7년6월까지로 즉 최대 7년6월의 징역형의 실형 선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배심원들은 1심의 미흡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심신미약 감경을 한 처단형의 범위 내에서 적정한 양형범주에 해당하는 양형 의견을 제시했다”며 배심원들의 판단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결과적으로 볼 때 배심원들은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은 1심 법원의 오류를 상식에 기초해 적정하게 시정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항소심, 똑똑한 배심원에 감탄…1심 법원은 질타
대전고법 “1심 오류에도 불구하고 적정한 양형 제시해” 기사입력:2008-05-31 17: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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