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그래프 검사는 수사 단서를 확보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피해자 진술이 '진실'로 판정되면 수사기관은 검사 결과를 압수수색이나 체포영장 신청 등 보강 수사를 추진할 단서로 활용할 수 있다. 거짓 반응이 나오더라도 곧바로 무고로 판단하기보다 진술의 모순과 사건 정황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자료에 따르면, 전체 폴리그래프 검사 건수는 2021년 1만3190건에서 2024년 1만618건으로 감소했다. 반면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검사는 같은 기간 437건에서 938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피해자 대상 검사는 2022년 1033건, 2023년 1054건으로 급증한 뒤 2024년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2021년의 두 배를 웃돈다.
성폭력 사건 전체 폴리그래프 검사에서 피해자 검사가 차지하는 비율도 2021년 9%에서 2022년 23%, 2023년 25%, 2024년 24%로 높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흔히 '거짓말탐지기'로 불리는 폴리그래프가 거짓말 자체를 측정하는 장비가 아니라는 점이다. 공포와 수치심, 불안, 분노 등 다양한 정서적 반응도 검사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폴리그래프만으로 진술의 진위를 가리기 어렵다.
신상화(인제대)·고준채(치안정책연구소) 연구진은 '성폭력 피해자 대상 폴리그래프 검사에 대한 전문가 인식 연구: 근거이론을 중심으로'(경찰학연구)에서 성폭력 피해자 대상 폴리그래프 검사의 과학적·윤리적 한계를 분석했다.

신상화(인제대)·고준채(치안정책연구소) 연구진의 2026년 〈경찰학연구〉 논문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폴리그래프 검사가 2021년 437건에서 2024년 938건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PTSD를 겪는 피해자의 공포 반응이 거짓 반응으로 오판되는 '위양성' 위험이 있다며, 검사 전 정신건강 선별 절차와 실질적 동의 절차의 제도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미지 디자인=로이슈 AI 디자인팀(*본 이미지는 기사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것입니다.)
이미지 확대보기연구진은 심리학 교수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권변호사, 여성상담지원센터장, 폴리그래프 검사관 등 실무 경력 10년 이상의 전문가 13명을 심층 면접과 개방형 설문으로 조사했다. 조사 참여자의 평균 실무 경력은 16.9년이었다.
폴리그래프 검사는 피검사자가 거짓말할 때 느끼는 심리적 갈등과 발각에 대한 두려움이 자율신경계 변화를 일으킨다는 가설에 기초한다. 검사 장비는 피검사자가 질문에 답할 때 나타나는 호흡과 혈압, 심박수, 피부전도도 등의 생리적 변화를 기록한다.
그러나 폴리그래프가 측정하는 생리적 변화는 거짓말에만 나타나는 고유한 반응이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나 신경이 늘 곤두서 있는 과각성 상태를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가해자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피해 행위를 묻는 질문만으로도 사건 당시의 공포와 수치심이 되살아날 수 있다.
피해자의 뇌가 질문을 위협 신호로 받아들이면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고 호흡과 심박수, 피부전도도 등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피해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 트라우마를 자극하면 진실을 말하면서도 거짓 반응으로 판정되는 '위양성(false positive)'이 나타날 수 있다. 피해자에게 진술의 진실성을 기계로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절차 자체가 2차 피해와 재외상화, 즉 트라우마를 다시 겪게 만드는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대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일부 피해자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감정과 감각을 차단하는 해리 반응을 보인다. 자율신경계 반응이 둔해지면 검사에서 뚜렷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거나 판독 불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수사관이나 검사관이 피해자의 무반응을 침착함이나 진술 신빙성 부족으로 해석하면 '피해자답지 않은 태도'를 문제 삼는 또 다른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검사관의 전문성과 질문 구성 방식도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질문을 선택하고 생리적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정이 달라질 수 있다. 연구진은 피해자의 심리·신체 상태와 검사 환경을 객관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면 폴리그래프가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보다 판단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 검사 요구 자체가, "진술을 믿지 않는다"는 신호 될 수도
전문가들은 폴리그래프 검사 요구 자체가 피해자에게 수사기관의 불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봤다.
성폭력 피해자는 이미 수사 과정에서 피해 사실을 여러 차례 진술해야 한다. 수사관이 피해자에게 폴리그래프 검사까지 요구하면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기계로 증명하라"는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다.
연구에 참여한 여성상담 분야 전문가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폴리그래프 검사를 실시하는 행위가 "수사기관이 피해자의 진술을 믿지 않는다는 암시가 될 수 있다"며,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을 키울 가능성을 지적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PTSD와 우울증, 불안장애 등에 취약한 피해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 검사가 단순한 심리적 부담을 넘어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수사기관이 피해자에게 검사 거부권을 설명하더라도 실질적인 자발성이 보장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피해자가 검사를 거부하면 진술을 의심받거나 수사가 중단될 수 있다고 느낀다면 형식적인 동의만으로 자발적 선택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피의자가 검사를 거부한 뒤 수사기관이 피해자에게 검사를 제안하는 관행은 입증 부담을 피해자에게 떠넘길 위험이 있다. 피해자는 범죄 피해를 신고한 사람인 동시에 자신의 진술이 사실임을 별도로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 전문가 인식, '수사 실리형·권익 보호형·전략적 통합형'
연구진은 전문가들의 인식을 '수사 실리형', '권익 보호형', '전략적 통합형' 등 세 유형으로 분류했다.
'수사 실리형'은 성폭력 사건에서 직접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고 당사자의 진술이 충돌하는 수사 현실을 강조했다. 수사 실리형은 폴리그래프를 인적 수사의 한계를 보완하고 수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다만 수사 실리형 전문가들도 무분별한 검사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피해자의 정신적·신체적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선별 도구와 전문 교육이 도입된다면 검사 위험을 줄이면서 수사상 필요성을 충족할 수 있다고 봤다.
'권익 보호형'은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재외상화 위험을 우선했다. 권익 보호형은 폴리그래프 검사가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는 절차로 작용할 수 있고, PTSD로 인한 생리 반응을 기만 반응으로 오인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피해자 대상 검사를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익 보호형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자발적 거부권과 검사 거부에 따른 불이익 금지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여성 전담 검사관을 배치하고 성인지 감수성과 트라우마 이해를 반영한 수사 환경도 마련해야 한다고 봤다.
'전략적 통합형'은 수사 필요성과 피해자 인권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검사를 전면 허용하거나 금지하기보다 절차적 정당성을 강화해 두 가치를 조정해야 한다는 접근이다.
전략적 통합형 전문가들은 검사 전 정신건강 상태에 대한 사전 선별을 의무화하고, 검사 과정에 심리 전문가나 피해자가 신뢰하는 사람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피해자의 특수성을 반영한 객관적 적합성 판단과 충분한 설명, 실질적인 동의 절차가 마련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검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피해자 검사, 법률 아닌 경찰 내부 지침에 의존
국내 법원은 폴리그래프 검사 결과의 증거능력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대법원은 검사관의 숙련도와 검사 장비의 정확성, 피검사자의 심신 안정 등 엄격한 요건이 충족돼야 검사 결과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 왔다.
그럼에도 수사기관은 폴리그래프 결과를 피의자 기소 여부나 진술 신빙성을 판단하는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경찰은 '과학수사 기본규칙'과 내부 표준업무처리지침에 따라 검사 전 대상자의 적합성과 심신 상태, 동의 여부를 확인한다. 성폭력 피해자 검사에는 전문 검사관을 투입하고 여성 검사관을 우선 배정하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피해자의 PTSD와 우울·불안 증상, 약물 복용, 과각성 상태 등을 판별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재 대상자 적합성 판단은 상당 부분 검사관의 문답과 육안 관찰에 의존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과 직결되는 검사임에도 상위 법령이 아닌 기관 내부 지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점도 한계로 지적됐다. 기관별 지침이 다르고 법적 강제력이 부족하면 검사관에 따라 적용 기준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연구진은 법률과 세부 지침이 충분하지 않은 '제도적 사각지대'에서 수사 효율성과 피해자 보호가 충돌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 미국, 수사 조건으로 피해자 검사 요구 금지
미국은 연방 여성폭력방지법(VAWA)에 따라 성폭력 피해자에게 폴리그래프 검사를 수사 개시나 유지, 기소 여부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행위를 엄격히 제한한다.
일부 주는 수사기관이 피해자에게 검사 자체를 요청하거나 요구하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검사를 요청할 수 있는 주에서도 피해자가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건을 종결하거나 수사를 지연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의 거부권과 검사 거부에 따른 불이익 금지 원칙을 사전에 고지하고 서면 동의를 받도록 한 주(州)도 있다. 폴리그래프뿐 아니라 음성 스트레스 분석 등 유사한 '진실 탐지 장치'까지 규제 대상에 포함하기도 한다.
영국도 폴리그래프를 피해자의 진술을 검증하는 수단이 아니라 고위험 성범죄자의 위험을 관리하는 제한적 도구로 활용한다. 피해자의 진술은 숙련된 면담과 지원을 통해 확보하고, 외상을 자극할 수 있는 기계적 진술 검증은 수사 절차에서 원칙적으로 배제한다.
연구진은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위험 관리를 분리하는 해외 제도가 국내 수사 절차에도 시사점을 준다고 평가한다.
■ "검사 전 정신건강 선별부터 제도화해야"
연구진이 도출한 핵심 개념은 수사상 실리와 윤리적 가치를 함께 고려하는 '전략적 균형화'다.
신상화·고준채 연구팀은 물적 증거가 부족한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폴리그래프에 대한 수사적 요구를 완전히 없애기 어렵다고 본다. 동시에 피해자의 외상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검사로는 결과의 과학적 신뢰성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피해자 보호는 수사 효율성을 위해 양보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검사 결과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의미다.
논문은 검사 전 피해자의 PTSD와 우울·불안, 약물 복용, 신체 상태 등을 평가하는 정신건강 선별 절차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검사 부적합 기준도 검사관의 경험에 맡기지 말고 구체적으로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검사 전 과정에는 충분한 설명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 동의 절차가 적용돼야 한다. 피해자가 검사를 거부하더라도 수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도 분명히 고지해야 한다.
여성 검사관 배치와 성인지 감수성 교육, 트라우마를 고려한 비침해적 질문 방식, 심리 전문가나 신뢰관계인의 참여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폴리그래프 검사 결과는 독립적인 진실 판정이 아니라 다른 수사 자료와 함께 제한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다만 신상화·고준채 연구는 성폭력 피해자를 직접 조사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경험과 인식을 통해 검사 실태를 간접적으로 재구성했다. 피해자의 재외상화 위험을 피하기 위한 연구 설계였지만, 실제 검사를 받은 피해자가 경험한 압박과 동의 과정, 검사 이후의 영향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연구진은 향후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한 조사 설계를 마련하고, 정신건강 선별 도구와 검사 환경이 판정 정확도와 재외상화 위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증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연구논문
신상화·고준채(2026). 성폭력 피해자 대상 폴리그래프 검사에 대한 전문가 인식 연구: 근거이론을 중심으로, 경찰학연구, 26(1), 275-309.
김지연(Jee Yearn Kim) Ph.D.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형사정책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법심리연구소 박사후 연구원으로, 생성형 AI 기술 역기능 및 사용자 위험 요인 대응 정책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범죄 행위의 심리학, 범죄자 위험 평가, 교정 개입 원칙, 형사사법 실무자 조직행동, 스토킹 범죄자 개입 등이다.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