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쓰촨 성의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 광복군 장교로 복무했다. 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장준하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했다. ‘사상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의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파,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았다가 국가원수 모독죄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신민당과 윤보선과 함께 국민당에서 활동했다. 1967년부터는 7대 국회의원을 지내 국방위에서 활동했다.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당시 유신정권은 하산 도중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1993년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했지만 아직까지 타살 여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