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슈=신종철 기자] 1970년대 정권의 언론탄압에 저항하다 해직된 동아일보 기자들의 이른바 ‘동아투위’(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해직기자 14명이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언론탄압에 의한 해직이라는 진실규명을 받았음에도 1ㆍ2심 법원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시효가 지났다는 국가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은 권리남용”이라며 원심판결을 뒤집고 불법행위를 저지른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무려 40년 만이다.
대법원 판결로 국가의 불법을 인정받아 배상을 받게 된 14명 중에는 해직기자로서 자유언론 수호와 언론민주화운동을 이끌다 지난 10월 8일 세상을 떠난 성유보 선생이 포함돼 있다. 또한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임채정(74) 전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3선의 이부영(73) 전 의원 등이다.
◆ 1960 ~ 1970년대 언론 탄압, 무슨 일이 있었나?
이번 사건은 언론사의 가장 암울한 사건이기에 자세하게 다룬다.
법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1967년부터 각 언론사에 담당기관원(중앙정보부 직원)을 출입하게 해 기자들의 동태와 보도될 기사내용에 대한 감시ㆍ감독을 수시로 해왔고, 1971년 말부터는 문화공보부가 직접 신원조회를 통해 기자들의 자격을 심사한 후 기자증을 발급해 주는 프레스카드제를 시행했다.
그 외에도 언론인들을 불법 연행해 밤샘조사를 하고 이들에게 사직서와 서약서의 작성을 강요하는 등 신문ㆍ방송의 제작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이후 ‘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은 국가안위, 국론분열 및 사회질서 혼란을 조장할 위험이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언론ㆍ출판을 규제하기 위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12월 27일 공포ㆍ시행했다.
뿐만 아니라 유신헌법과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를 공포ㆍ시행하는 등 법적으로도 언론의 자유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언론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1년 4월 15일 ‘기자적 양심에 따라 사실을 진실대로 보도하고, 외부로부터 직ㆍ간접으로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을 일치단결하여 배격하며, 명예를 걸고 기관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제1차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다.
당시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문화방송, 동화통신 등 전국 각지 14개 신문, 방송, 통신사 소속 언론인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제1차 언론자유수호선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972년 11월 21일 언론의 자유를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는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라는 형식을 빌려 확정지었다.
이에 경향신문 수습기자들의 1973년 10월 19일자 결의문을 필두로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인들의 제2차 언론자유수호선언이 이어졌다. 동아일보사 소속 언론인들 역시 1973년 11월 20일 제2차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국내외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인식하고 유신체제나 안보에 위해가 되는 기사는 싣지 않기로 한다’는 내용의 ‘자율방침’을 마련해 각 언론사 발행인들로 하여금 이에 서명하도록 종용하는 등 정부의 언론 탄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에 동아일보 소속 언론인들은 제2차 언론자유수호선언에 연이어 1973년 12월 3일 ‘발행인 서명공작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본사 발행인이 당국의 강압에 못 이겨 끝내 자율방침에 서명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신문제작과 방송뉴스의 보도를 거부한다’는 내용의 제3차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가 1974년 10월 23일 동아일보 송건호 편집국장 등을 연행해가자 다음날 동아일보사 편집국ㆍ방송국ㆍ출판국 기자 등 180여명은 동아일보사 사옥에 모여 ‘자유언론에 역행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고, 언론자유수호선언에서의 행동강령을 재확인 하는 등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
당시 위 운동에 동참한 신문, 방송, 통신사들은 한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KBS, MBC 등 35개 사에 달했다.
이 같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이어지자, 중앙정보부는 1974년 12월 동아일보의 주요광고주 혹은 광고책임자들을 중앙정보부로 불러 광고해약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 광고수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8개 대광고주들이 일시에 광고계약을 철회했다. 1975년 1월에는 동아일보 평상시 상품광고의 98%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동아방송의 경우도 광고방송의 84%가 해약됐다.
이에 따라 동아일보사는 1974년 12월 26일부터 일부 광고지면을 백지인 상태로 내보낼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신민당,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의 단체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언론탄압의 해제를 촉구하는 내용에서 개인광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의 격려광고를 동아일보에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려광고는 1975년 5월 8일까지 계속됐고 그 수는 무려 1만 352건에 이르렀으며 이로 인해 동아일보사에 1억 1294만원의 격려광고비가 들어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격려광고에 대해서도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1975년 2월 28일 새로 취임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경영악화를 내세워 조직을 축소하고, 자유언론실천운동 핵심 인물과 동아노조지부장 등을 사전 통고도 없이 해임했다. 또한 해임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기자들도 추가로 해임했다.
이에 동아일보사가 정권의 언론탄압에 굴복해 기자들을 해임한 것이라 판단한 동아일보사 소속 기자 등 언론인들이 1975년 3월 12일부터 ‘해직사원들의 복직과 주필의 즉각 퇴진이 관철될 때까지 신문ㆍ방송ㆍ잡지의 제작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더불어 편집국, 공무국을 점거하고 신문과 방송의 제작을 거부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이른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즉 ‘동아투위’다.
그러자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1975년 3월 17일 새벽에 경비 등을 동원해 기자들의 농성을 강제로 해산시킨 다음 6월 24일 사이에 무려 49명의 언론인을 해임하고, 84명의 언론인을 무기정직 시켰다. 무기정직자들도 복직명령을 받지 못해 결국 자동해임 됐다.
◆ 과거사정리위 “언론인 대량해임은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정책에 따라 자행된,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
이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양진 등 49명으로부터 2006년 4월 18일 동아일보사에 대한 광고탄압 및 이에 항거한 언론인들에 대한 대량 해임에 부당한 공권력의 개입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받았다.
이를 조사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광고탄압과 언론인 대량 해임ㆍ무기정직은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정책에 따라 자행된,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행위”라는 취지의 진실규명결정을 했다.
그러면서 국가에 대해 동아일보사 및 해임된 언론인들에 대한 사과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동아일보사에 대해서도 해임된 언론인들에 대한 사과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사망한 유족들은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과 유신정권을 유지하려는 국가가 언론통제에 항거한 동아일보사 소속 언론인들을 해임시킬 목적으로 동아일보사에 광고탄압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을 행사했고, 이에 굴복한 동아일보사가 소속 기자 등을 해임한 것이라는 진실이 규명됐다”며 “따라서 국가는 사죄문구가 기재돼 있는 ‘사죄광고’를 5대 일간지의 1면 하단에 게재하고, 국가의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부당하게 해임을 당한 기자 등에게 위자료로 각 1억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소송을 냈다.
◆ 1심과 2심, 국가 불법행위 인정하면서도 소멸시효 이유로 손해배상청구 기각
1심인 서울중앙지법 제26민사부(재판장 이승호 부장판사)는 2011년 1월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로 소멸했다”는 피고의 주장을 받아들여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먼저 “피고는 당시 유신체제의 언론통제에 저항해 언론자유수호운동의 중심이 된 동아일보사 소속 언론인들을 해임시킬 의도로써 동아일보사의 광고 수주를 차단하는 광고탄압이라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을 이용했고, 이로 인해 원고 등 동아일보사 소속 언론인들이 몸담아 온 언론사를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떠날 수밖에 없음으로써 막대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다”며 “따라서 피고는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해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금전으로나마 위자할 의무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그러나 “원고 등을 포함한 해직언론인들이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4월 국회에 ‘해직언론인들의 원상회복, 진상규명 및 보상을 위한 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청원을 제출했고, 2004년 11월에는 국회의원 17명의 서명을 받아 그들의 발의로 ‘해방이후 언론탄압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에 비춰보면, 원고 등은 적어도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들을 청산하기 시작한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2월 혹은 청원 등을 국회에 제출한 1993년 4월부터는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인데, 이 소가 그로부터 5년이 경과된 후인 2009년 12월 제기됐음이 명백하므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이미 시효로 소멸했다”며 기각했다.
이에 해직기자들과 유족들이 항소했으나, 서울고법 제15민사부(재판장 김용빈 부장판사)는 2012년 3월 원고들의 항소를 기각하며 1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소멸시효와 관련 재판부는 “원고 등은 법원 등 사법기관에 대한 막연한 불신 때문에 적극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등 피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므로 군부정권이 끝나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선 시점부터는 손해배상을 구할 수 있었고, 원고들 주장과 같이 피고가 불법행위를 시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상파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거나 혹은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원고들이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웠다는 등의 사정만으로는 그동안 원고들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정이 있었다거나 피고가 원고들의 권리 행사나 시효 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하게 곤란하게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나아가 국가가 원고 중 일부를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2004년 6월 민주화운동관련자로 결정했거나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피고에게 원고 등의 피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하도록 권고했다는 등의 사정만으로는 원고들에게 (손해배상청구) 권리에 대한 시효완성을 원용하지 않을 것을 신뢰하게 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달리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 따라서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 대법원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될 수 없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이들 중 동아일보 해직기자로 최근 세상을 떠난 고 성유보 선생 등 14명에 대해서는 시효가 만료되지 않았다며 원심 판단을 뒤집었다. 이들은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해 피해사실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대법원 제2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동아일보 해직기자와 유족 등 134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2012다35675)에서 원고 전부 패소 판결한 원심을 뒤집고,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해직기자 14명에 대한 사건을 다시 심리 판단하라”며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5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언론인 중 성유보 등 진실규명결정을 받은 14명을 포함한 50명이 2006년 4월 ‘광고탄압사건’ 및 ‘동아일보사 언론인 해직사건’에 관해 진실규명신청을 한 사실,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10월 21일 이 사건에 관해 진실규명결정을 한 사실, 원고들은 진실규명결정 후 피고가 피해회복을 위한 입법 등의 아무런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자 진실규명 결정일부터 1년이 지난 2009년 12월 16일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사실관계를 법리에 비추어 보면, 피고 산하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결정을 해 피고가 소멸시효의 이익을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신뢰를 부여했고, 진실규명결정을 받은 원고들은 진실규명 결정일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고 할 것이므로, 이러한 진실규명결정을 받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에 대해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진실규명결정을 받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에 대해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니, 이러한 원심의 판단에는 소멸시효 항변의 권리남용 해당 여부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동아투위 성유보 해직기자 등…국가 언론탄압 손해배상책임”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은 권리남용”이라며 원심판결 뒤집고 불법행위 저지른 국가 손해배상책임 인정 기사입력:2014-12-25 23: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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