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5년간 학대 문제를 전문으로 다뤄온 미국의 심리치료사 베벌리 엥겔(Beverly Engel)은 〈싸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 기고를 통해 학대 피해 경험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짚었다.

미국의 심리치료사 베벌리 엥겔이 〈싸이콜로지 투데이〉(2026)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신체적·성적 학대나 극심한 방임을 겪은 사람 가운데 최대 3분의 1이 성장 후 타인을 학대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대 경험자의 가해 위험은 일반 인구보다 약 6배 높다. 엥겔은 부정·가해자 동일시·복수심·수치심·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폭력의 대물림을 만든다며, 자책보다는 과거 경험과 현재 행동의 연결고리를 인식하고 상담·치료를 통해 패턴을 끊는 개입과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이미지 디자인=로이슈 AI 디자인팀(*본 이미지는 기사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것입니다.)
이미지 확대보기■ 피해자가 가해자로... 학대 경험자, 가해 위험 일반인보다 6배 높아
엥겔이 인용한 연구에 따르면, 신체적·성적 학대를 경험하거나 극심한 방임을 겪은 사람 가운데 최대 3분의 1은 성장 이후 타인을 학대하는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대 경험자의 가해 위험은 일반 인구보다 약 6배 높다.
다만 모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자신이 경험한 폭력을 똑같은 형태로 반복하지도 않는다. 어린 시절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 반드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대신 자녀를 방임하거나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 "부모는 날 사랑했어"... 학대를 부정하는 심리
엥겔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첫 번째 요인으로 '부정(denial)'을 꼽았다.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극단적인 학대조차 "부모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남성 피해자는 자신이 학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사회가 남성이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피해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다. 엥겔은 "많은 남성이 성장한 뒤에도 자신이 겪은 피해와 현재 자신의 공격적 행동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공격한다"... 가해자 동일시
엥겔이 꼽은 또 다른 심리 메커니즘은 '가해자 동일시(identifying with the aggressor)'다. 가해자 동일시는 자신을 위협했던 대상의 행동과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는 심리 현상이다. 피해자는 과거 느꼈던 공포와 무력감을 피하려 가해자의 행동과 태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엥겔은 "피해자가 무의식적으로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심리를 형성하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 태도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 "이번엔 내가 힘 있는 사람"... 무력감이 만든 복수 심리
학대 경험은 사람에게 극심한 무력감을 남긴다. 일부 피해자는 성장한 뒤 다른 사람을 통제함으로써 잃어버린 힘을 되찾으려 한다. 억눌렸던 분노가 복수의 형태로 전환되는 셈이다.
엥겔은 "이러한 심리 뒤에는 '이제 나는 강해졌다. 다시는 누구도 나를 다치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무의식적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자녀나 배우자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를 향해 표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 수치심은 비난으로 바뀐다
수치심(shame) 역시 반복을 만드는 핵심 요인이다. 학대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가치하거나 약하다는 감정을 강하게 내면화한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는 과도한 자신감이나 공격성으로 이를 감추려는 경향을 보인다.
엥겔에 따르면, 강한 수치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문제 상황이 발생할 때 자신의 책임보다 타인을 먼저 비난하는 경향을 보인다. "모든 잘못은 남 탓"이라는 사고방식이 굳어지면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워진다. 결국 폭력적 행동도 정당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 "부모처럼 살기 싫었는데"...결국 같은 행동 반복
부모를 강하게 미워하는 사람도 비슷한 행동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엥겔은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오히려 반복을 강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모를 비난하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부모의 행동 방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는 결국 자신이 가장 거부했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 "자책보다 중요한 건 패턴 끊기"
엥겔은 이미 폭력적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면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과도한 자기비난은 수치심을 키워 악순환을 강화할 수 있다. 핵심은 과거 경험과 현재 행동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식하고, 상담과 치료를 통해 반복되는 패턴을 끊어내는 일이다.
엥겔은 "상처받은 사람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다"라며, "중요한 것은 과거의 상처를 인정하고 상담과 치료를 통해 반복되는 폭력의 패턴을 끊어내도록 돕는 개입과 지원"이라고 강조했다.
▶ 원문 기사 출처
"Why some victims of child abuse repeat what was done to them" Beverly Engel, L.M.F.T. 2026.05.10. 〈Psychology Today〉
김지연(Jee Yearn Kim) Ph.D.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형사정책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법심리연구소 박사후 연구원으로, 생성형 AI 기술 역기능 및 사용자 위험 요인 대응 정책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범죄 행위의 심리학, 범죄자 위험 평가, 교정 개입 원칙, 형사사법 실무자 조직행동, 스토킹 범죄자 개입 등이다.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