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출신이 말해주듯 법원내부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최고의 사법전문가인 이 총재는 먼저 신 대법관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로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준엄히 질책하는 듯싶다가도, 어느새 대법원의 진상조사결과를 보고 판단할 문제라고 한발 물러서며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또 야권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잇따른 사퇴와 탄핵 주장에 대해서도 정치쟁점화하려는 의도가 있어 옳지 않다며 ‘경거망동’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삼가할 것을 훈계한다.
이는 마치 정쟁에서 한발 물러나 심판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으로 보여, 원칙을 중시하는 ‘대쪽’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형국이다.
먼저 이 총재는 9일 주요당직자회의 모두발언에서 “법관은 헌법에 의해 직무상 재판상 독립을 보장받고 있으므로 법관의 재판에 대해서는 소속 법원장은 물론 상급 법원장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지시나 간섭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이어 “법관이 재판을 부당하게 지연시키고 있는 경우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법원장이 시한을 정해 조속한 사건의 처리를 촉구하는 것은 재판 간섭이 될 소지가 있어 부적절한 처사”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지금 정치권 일각과 일부 시민단체에서 신 대법관의 사퇴와 탄핵까지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 성급할 뿐 아니라 이번 사건을 정치쟁점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여서 옳지 않다”며 “대법원의 자체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섣부르게 신 대법관에 대한 탄핵 문제를 거론하는 경거망동은 삼가야 한다”고 훈계한다.
아울러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법부도 그동안의 사법부 자세에 대해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사법부를 향해 충고도 빼놓지 않았다.
“지난 정권 시절 법관 중에 이념적으로 편향된 시각에 사로잡히거나 이념적으로 편향된 여론과 시민단체들의 목소리에 영합하고 정권이나 법원 내 상급기관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사람은 없었는지 자성해 볼 일”이라고 충고한 것.
그러면서 “강조하거니와 법관은 독립불기(獨立不羈=남에게 구속되지 않고 소신대로 일처리)의 신성한 자리”라며 “이러한 독립성을 지키는 일은 법관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선법 법관으로서 법관의 자세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단서를 단다. “다만 만일 그 내용이 사건의 처리 지연을 원장으로서 걱정하는 수준이라면 사법 감독관인 법원장으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 것.
그러면서도 “법원장이 보낸 이메일 내용을 보면 통상적인 절차로 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 있다”며 “만약 통상적인 절차로 하라는 것이 헌재에 위헌제청을 요구하는 절차를 취하지 말고 형사재판으로 끝내라는 취지라면 법관의 재판 내용에 간섭하는 것으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야단을 쳤다.
그러더니 이번엔 “지금 대법원에서 사실내용과 경위에 대한 자체조사에 착수하고 조사결과를 곧 밝힐 것으로 생각된다”며 “그런 만큼 우리는 사법부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대법원의 자체 조사결과가 나온 뒤에 보다 정확한 언급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이 총재의 이 같은 일련의 행보가 마치 원칙과 신중론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원칙을 강조하는 ‘대쪽’ 이미지와는 맞지 않아 보인다. 이는 이 총재가 추구하려던 ‘통 큰 어른의 정치’가 아닌 오히려 ‘눈치보기 정치’라는 역풍으로 저평가 받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