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당직 중 연정 품은 괴한에 살해…업무상재해

대법원 “야간당직 직무 자체가 성적 표적 위험성 내포해” 기사입력:2008-08-29 18:16:55
경비가 허술한 병원에서 야간당직을 서던 간호사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었던 퇴원 환자에 의해 살해된 경우라도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충북 제천에 있는 한 정형외과에 2006년 4월 입원해 한 달간 무릎치료를 받은 이OO(23)씨는 담당 간호사인 A(29·여)씨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간호업무를 수행하자 연정을 품게 됐다.

이씨는 퇴원 후 A씨를 만나 교제를 제의했으나 A씨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거절했다. 그러자 이씨는 앙심을 품고 흉기로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하기로 마음먹고 야간 당직근무 중이던 2006년 5월20일 A씨를 찾아갔으나, A씨가 소리를 지르며 거부하자 흉기로 8회 찔러 살해했다.

이에 A씨의 어머니 박OO(47)씨는 “업무상 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보상 및 장의비 지급 신청을 했으나, 공단이‘이 사건은 연정에 의해 발생한 것이므로 업무와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 소송을 냈다.

한편 이씨는 처음 체포돼 조사를 받을 때에는 망인을 잘 알지 못했다고 진술했다가 경찰이 이씨의 범행을 강도살인으로 의율해 검찰에 송치한 후 검찰 조사에서는 연정을 품고 있었는데 교제신청을 받아주지 않아 살인한 것이라고 진술을 번복했다. 이씨는 살인죄로 기소돼 징역 15년이 확정됐다.

◈ 1심 “업무상 재해”

1심인 청주지법 행정부(재판장 어수용 부장판사)는 지난해 11월 망인 A씨의 어머니 박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근로자가 타인의 폭력에 의해 재해를 입은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사적인 관계에 기인한 경우나 피해자가 상대방을 자극한 경우에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할 수 없지만, 직장 내 인간관계 혹은 직무에 내재하거나 통상 수반하는 위험의 현실화로서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있으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씨가 망인을 연모하다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격분해 살해했을 뿐 망인이 이씨를 자극했다고 볼 수 없고, 병원이 특별한 경비시설이 설치돼 있지 않아 외부인을 통제할 수단이 없고, 특히 야간에는 여성 간호사만이 당직근무를 해 외부인 침입에 의한 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점 등을 종합하면 망인의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 항소심 “업무상 재해 아니다”

그러나 항소심은 대전고법 제1행정부(재판장 여상훈 부장판사)는 지난 5월 1심 판결을 뒤집고, 근로복지공단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망인이 환자인 이씨를 간호하는 과정에서 이씨가 연정을 품게 된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 됐더라도, 이씨가 교제요구를 거절하는 망인을 살해한 것은 간호업무에 내재돼 있거나 간호업무에 통상 수반되는 위험이 현실화된 것으로 보기도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할 때, 이씨가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에서 유발된 것으로 업무의 기인성을 인정하기 어려워 업무상 재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 대법 “업무상 재해 맞다”

이에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항소심과 달랐다. 대법원 제3부(주심 이홍훈 대법관)는 최근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되돌려보낸 것으로 29일 확인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씨가 범행 당시 망인보다 6살이나 어리고, 불과 24일 정도밖에 입원치료를 받으면서 환자와 간호사의 관계로 접촉했을 뿐이므로, 이씨가 교제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살해를 결의할 만큼 망인에 대해 깊은 연정을 품고 있었다거나 교제요구의 거부에 대해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계획적으로 흉기를 갖고 병원에 침입해 숨어 있다가 출입문을 폐쇄하자 곧바로 흉기를 들이대고 위협한 이씨의 행위가 망인에게 교제를 요구하는 행위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또 “망인이 범행 당시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동전으로 8000원 정도만을 갖고 있었던 점에 비춰 보면, 이씨가 강도나 절도의 목적으로 병원에 침입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해 보인다”며 “따라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씨의 진술만으로 이씨의 가해행위가 전적으로 망인과 사적인 관계에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설령 이씨가 강도의 목적으로 병원에 침입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병원 경비업무를 수행하던 망인으로서는 흉기를 들고 위협하는 이씨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저항하다가 살해된 이상 망인의 사망은 경비업무와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뿐만 아니라 병원의 외부 침입에 대한 취약성, 여성 혼자서 야간당직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근무형태 등에 비춰 보면 망인의 직무 자체에 성적 범행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내재돼 있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그럼에도 원심은 이씨의 신빙성 없는 진술에만 의존해 망인의 사망이 순전히 이씨의 개인적인 원한이나 감정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단정해 업무의 기인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은 업무상 재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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