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직접증거 없는 살인사건 보따리상 무죄

“유죄 의심 들기는 하나, 검찰의 공소사실 입증됐다고 보기 어려워” 기사입력:2012-10-15 14:45:57
[로이슈=법률전문 인터넷신문] 중국에서 함께 생활하던 남성을 흉기로 무참히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던 보따리상에게 대법원이 비록 유죄의 의심은 가나 직접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확정했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중국을 오가며 의류 보따리상을 하던 A(57)씨는 지난 2008년 4월 중국 대련시에 있는 비자국에서 의료기 판매를 하던 B씨를 알게 됐다. A씨는 약간의 보수를 받고 대리점을 개설하려는 B씨의 중국어 통역을 도와주기로 하고 함께 거주했다.

그런데 B씨는 A씨의 중국어 통역 능력 및 생활습관에 불만을 느껴 갈등이 생겼고, 둘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그러던 중 2006년 6월16일 A씨는 B씨와 함께 생활하던 오피스텔에서 심하게 다투다가 흉기로 수회 찌른 뒤 그대로 방치한 채, B씨의 카드 2장을 가지고 도망간 혐의로 기소됐다.

B씨의 사체는 사건 발생 20여일 뒤 발견됐다. 검찰이 A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사건 다음날 A씨가 손목과 무릎에 생긴 상처를 병원에서 치료받았는데, 치료비를 B씨의 은행카드로 돈을 찾아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또 A씨는 사건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일본으로 출국하는 등 체포를 면하기 위해 도망 다닌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대해 A씨는 “B씨를 살해한 사실이 전혀 없고, B씨는 교제하던 중국인 여성의 남편과 그 일행으로 보이는 괴한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심인 인천지법 제12형사부는 2010년 3월 A씨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현장의 구조 및 상태, 피고인이 치료 받은 정황, 사건 이후의 피고인의 행적, 피고인의 비합리적인 진술내용과 진술번복 과정 등을 살펴보면 피고인이 범행장소에서 피해자와 서로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흉기를 갖고 혈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흉기로 수회 찔러 살해하고 금품을 절취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A씨가 “피해자를 살해하지 않았다”며 항소했고, 서울고법 제12형사부(재판장 최재형 부장판사)는 2010년 9월 유죄를 인정한 1심 판결을 깨고,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건 장소 거실에는 38개의 신발자국이 있는데 적어도 2개의 다른 신발자국인 점, 베란다에도 1개의 신발자국과 혈흔이 남아 있는 점 등에서 피고인이 주장하는 중국인 2명과 조선족 1명이 베란다로 침입했다는 것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밝혔다.

또 “피해자에게 상해를 가한 흉기가 2개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데, 피고인이 피해자를 죽였다 하더라도 2개 이상의 흉기를 사용해 피해자 신체 부위 여러 곳을 수차례 찔러 잔혹하게 죽여야 했는지 쉽게 수긍이 되지 않고, 또한 설령 통역 등으로 인해 두 사람이 갈등이 있었더라도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할 동기가 너무 약하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검찰의 공소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사건은 검사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중국어 통역을 도와주려고 만났던 사업가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강도살인)로 기소된 A(57)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먼저 “피고인의 범행을 인정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이 사건에서는 검사 제출의 증거들에 의해 인정되는 간접사실이나 정황사실에 의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범죄사실의 증명이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따져 봐야 하고, 그러한 정도의 입증이 없다면 비록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를 살펴봐도 피고인이 피해자를 죽였다는 직접증거가 없는 이 사건에서, 피해자의 사망 무렵 피고인이 함께 있었고, 피고인이 피해자의 은행카드로 병원 치료를 받은 점 등에 비춰 피고인이 피해자를 죽이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검사 제출의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한 원심은 사실심 법관의 합리적 자유심증에 따른 것일 뿐, 그것이 위법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한 상고심(대법원)은 사후심으로서 원심(2심)까지의 소송자료만을 기초로 삼아 원심판결의 당부를 판단해야 하므로, 원심에서 증거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증거로 채택되지 않고 증거조사도 거치지 않은 증거들을 들어 범죄사실의 증명이 이루어졌다거나 원심의 사실인정을 탓하는 취지의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결국 원심판결에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사실인정을 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는 상고이유 주장은 이유 없다”고 판시했다.

자유심증주의는 증거의 증명을 법관의 자유판단에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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