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일본기업, 강제징용 피해 손해배상해야”

일본과 일본기업 상대로 제기된 소송에서 승소 가능성 열어둔 최초의 사법적 판단 기사입력:2012-05-24 16:50:58
[로이슈=법률전문 인터넷신문]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 징용된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과 받지 못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피해를 입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과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여러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 가능성을 열어둔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따라서 현재 일본, 미국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른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 사건 개요 = 일본은 1937년 일어난 중일전쟁과 1941년 일어난 태평양전쟁을 치루면서 군수물자 생산 등에 있어 국가적인 노동력 부족 현상을 겪게 되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44년 9월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강제징용을 실시했다.

이에 이OO(86)씨 등은 1944년 9월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 징용돼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의 기계제작소와 조선소에서 월 2회만 쉬며 매일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철판을 자르는 등 매일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물론 식사는 잠자리가 제대로 제공될 리 만무했다.

숙소 주변에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고 근무시간은 물론 휴일에도 헌병과 경찰 등에 의한 감시가 삼엄해 생활의 자유는 거의 없었으며,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의 편지 교환도 사전 검열에 의해 그 내용이 제한됐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기계제작소와 조선소 등이 모두 파괴돼 작업이 중단됐고, 그 와중에 부상을 입었고 일본이 항복을 선언해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하지만 귀국 후 강제징용 이전에 다니던 직장을 잃는 등 종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원자폭탄 피폭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최근까지 전신권태감, 호흡곤란, 피부질환, 시력감퇴 등의 각종 신체적 장해에 시달리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1951년 연합국과 일본국은 전후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일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에 따라 한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 및 전후 보상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해 1965년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국과 일본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으로 ‘한국과 일본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다.

그런데 이 청구권협정은 일본이 한국에 10년간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하는 내용이었고, 그 대신 ‘개인들의 청구권은 포기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일본 정부는 이를 근거로 미지급 임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한국도 1974년 12월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이 마련됐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중 사망자에 대한 보상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 부상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 두지 않아 우리나라 정부로부터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이씨 등은 1995년 12월 일본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또다른 피해자들은 1997년 12월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과 강제노동기간 동안 못 받은 임금 등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소멸시효가 지났다거나, 해당 기업들이 해산 후 다시 설립돼 불법행위의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결국 이들은 한국 법원에 “두 업체가 원고 등에게 약속한 임금을 지급할 것과 강제노역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로 각 1억 원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며 손해배상 등 청구소송을 냈다.

하지만 1심 부산지법과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고, 항소심인 부산고법과 서울고법도 1심 판단을 유지했다.

판결의 핵심은 “일본 판결의 효력을 대한민국 법원이 승인하는 결과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위반되지 않으므로 일본판결을 승인하고, 승인된 일본 판결은 기판력을 가지므로 원고들의 청구에 대해 일본 판결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원고들의 청구권은 “대한민국과 일본국의 국교가 정상화된 1965년 6월로부터 기산하더라도 이 사건 소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2000년 5월 제기됐으므로 손해배상채권은 이미 시효로 소멸했다”거나, 일본의 기업재건정비법에 의해 해산된 옛 일본제철과 피고 신일본제철 사이에는 법인격의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음을 이유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 대법원, 강제징용 피해자 패소 판결한 원심 뒤집고 승소 취지 판결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제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24일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고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린 이OO(86)씨 등 6명이 (주)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및 임금지급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또 같은 재판부는 이날 여OO(89)씨 등 4명이 일본제철의 후신인 (주)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등 청구소송에서도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다시 판단하라”며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먼저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비춰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렇다면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런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하다”며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본 판결을 승인해 그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럼에도 원심은 일본 판결의 효력을 대한민국 법원이 승인하는 결과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지 않으므로 승인된 일본 판결의 기판력에 의해 원고들의 청구에 대해 일본 판결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고, 대한민국 법원의 독자적인 관점에서 직접 판단하지 않은 원심 판결은 외국 판결의 승인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구 일본제철은 신일본제철과 실질에 있어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법적으로는 동일한 회사로 평가되기에 충분하고, 일본의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구 일본제철이 해산되고 제2회사가 설립된 후 흡수합병 과정을 거쳐 신일본제철로 변경되는 절차를 거쳤다고 해서 달리 볼 것은 아니다”며 “따라서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청구권을 신일본제철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청구권 소멸시효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으므로, 피고에 대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고, 구 일본제철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법적 지위에 있는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해 원고들에 대한 채무의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며 “따라서 이 부분도 원심은 잘못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그 동안 종군위안부, 강제동원피해자 등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자들이 일본국이나 일본기업을 상대로 미국에서 제기한 소송에서 미국의 법원은 피해자들의 청구가 재판에 회부될 수 없는 정치적 문제라는 등의 이유로 피해자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판결에서 일본의 재판소나 미국의 법원의 판단과 달리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관점에서 원고들 청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피고들이 내세운 주장을 배척함으로써, 환송 후 사실심에서 원고들의 승소 가능성이 높아지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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