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하면 더 힘들 것 같았다"... 여성 성폭력 피해자들이 경찰 문턱에서 멈춘 이유

[형사정책 연구브리핑] 옷차림·음주 따지는 통념과 "신고해도 소용없다"는 예상이 침묵 불러.. 연구팀 "믿어주는 시스템이 먼저" 기사입력:2026-09-10 19:56:33
성폭력은 대표적인 '암수범죄'로 꼽힌다. 실제 피해가 발생해도 경찰에 신고되지 않아 공식 범죄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신고가 이뤄진 뒤에도 수사와 기소, 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건이 중단되거나 피해자가 신고를 철회하는 일이 적지 않다. 최종적으로 기소와 유죄 판결에 이르는 비율도 낮다.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는 데도 대가는 따른다. 성폭력 피해는 정신건강과 신체건강, 교육과 대인관계에 장기간 영향을 줄 수 있다. 신고하지 않으면 필요한 지원이나 국가 보상에 접근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고,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한 피해생존자는 더 심각하고 지속적인 심리적 외상을 겪을 수 있다.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아 다시 범행할지 모른다는 죄책감과 불안을 떠안기도 한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왜 신고하지 않는가.

기존 연구에서는 성폭력에 대한 고정관념과 피해의 강도, 물리적 폭력 여부 등이 신고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신고할 만큼 심각한 일'로 여기지 않거나, 삽입이 수반되지 않은 형태의 성폭력은 신고할 정도의 피해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체적 상처나 무기가 동반된 사건일수록 신고 가능성이 높았다.

가해자와의 관계도 영향을 미쳤다. 성폭력 피해자는 가해자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지인이나 연인.데이트 상대, 친구가 가해자인 사건은 오히려 경찰에 신고될 가능성이 낮았다. 가족이나 사회적 관계에 미칠 파장을 걱정하거나,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피해자에게도 책임을 돌릴 것이라는 우려, 수사 과정에서 다시 상처받을 가능성 등이 신고를 가로막았다.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대의 소피 스튜어트(Sophie Stewart) 연구팀은 논문 <"그냥 이 일을 잊고 살아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현대적 고찰>에서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봤다. 연구자가 피해자를 불러 "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는 대신, 피해생존자들이 스스로 온라인에 남긴 말을 분석한 것이다.

연구팀은 유튜브 영상 'Women Tell Us Why They Didn't Report Their Sexual Assault'에 달린 댓글 가운데 성인 여성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경험을 추려 질적 분석(응답을 숫자로 집계하는 대신 글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해석하는 연구 방법)을 진행했다. 기존 설문은 연구자가 미리 제시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를 고르게 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의 복잡한 경험과 미묘한 맥락을 놓칠 수 있다. 반면 온라인 댓글은 연구자의 질문이나 유도 없이 익명 또는 가명으로 자발적으로 작성된다. 연구팀은 온라인 댓글 분석으로 피해자가 무엇을 신고의 장벽으로 느꼈는지 더 자연스럽고 여과되지 않은 형태로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분석 결과 신고를 가로막는 세 가지 주제가 드러났다.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불신', '자기비난', '가해자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대 소피 스튜어트 연구팀(2024) 연구에 따르면, 여성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온라인에 자발적으로 남긴 경험담을 분석한 결과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과 자기비난, 가해자와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신고를 가로막는 3대 장벽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피해자를 탓하고 낯선 사람의 공격만을 '진짜 성폭력'으로 여기는 통념이 피해자의 침묵을 부른다며, 신고해도 다시 상처받지 않는 피해자 중심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이미지 디자인=로이슈 AI 디자인팀(*본 이미지는 기사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것입니다.)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대 소피 스튜어트 연구팀(2024) 연구에 따르면, 여성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온라인에 자발적으로 남긴 경험담을 분석한 결과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과 자기비난, 가해자와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신고를 가로막는 3대 장벽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피해자를 탓하고 낯선 사람의 공격만을 '진짜 성폭력'으로 여기는 통념이 피해자의 침묵을 부른다며, 신고해도 다시 상처받지 않는 피해자 중심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이미지 디자인=로이슈 AI 디자인팀(*본 이미지는 기사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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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도 없는데 신고해봐야"... 피해자가 먼저 접은 '사법 불신'

가장 먼저 드러난 장벽은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이었다.

피해생존자들은 신고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이 오히려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볼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연구팀은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을 다시 '증거가 없다'는 인식과 '신고 과정에서 다시 상처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나눴다.

특히 피해자들은 신체적 상처가 없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증거가 거의 없다" 또는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피해가 '충분히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심각한 신체적 부상이 없으면 강제성을 입증하기 어렵고, 경찰이나 법원이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피해자의 판단이 실제 법적 기준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논문에 따르면, 신체적 상처가 없는 피해자는 자신의 경험이 사회가 생각하는 이른바 '진짜 강간'의 전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고해도 인정받기 어렵다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이 피해자 자신의 판단에도 스며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고 이후 겪어야 할 과정 자체를 두려워한 피해자도 있었다. 한 여성은 고소한 뒤 법정에서 가해자의 얼굴을 계속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사건을 계속해서 다시 경험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신고를 주저했다.

신고했다면 여러 면에서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피해자도 있었다. 피해 사실을 알리는 행위가 보호와 정의로 이어지기보다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예상이 신고를 막은 셈이다.

■ "내가 그런 상황에 들어갔으니까"... 가해자 아닌 자신을 탓한 '자기비난'

두 번째 장벽은 자기비난(self-blame)이었다.

한 피해자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신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피해자는 "내가 스스로 그런 상황에 들어간 것을 탓했다"고 적었다. 성폭력의 책임이 가해자에게 있는데도 피해자가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서 원인을 찾은 것이다.

스튜어트 연구팀은 자기비난의 배경에 사회에 퍼져 있는 강간통념(rape myths.성폭력의 원인과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잘못된 통념)이 있다고 봤다. 피해자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술을 마셨는지, 왜 그 장소에 갔는지, 얼마나 강하게 저항했는지를 따지면서 가해자의 행동보다 피해자의 행동에서 원인을 찾는 고정관념이다.

문제는 피해자가 강간통념의 대상이 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해자 자신도 사회의 통념을 내면화할 수 있다. 성폭력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신고해야 할 이유조차 스스로 약화시키는 것이다.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한 여성은 "우리 모두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일어난 일도 우리 책임이 아닌데 이렇게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 슬프다"고 적었다. 분석 결과는 자기비난이 사라져도 피해 경험에 따라붙은 수치심은 남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 "남자친구였으니까"... 낯선 사람보다 어려운 '아는 가해자' 신고

세 번째 장벽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남자친구가 가해자인 사례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과거의 동의가 이후의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지만, 피해자는 이전에 가해자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경찰이나 법원이 자신의 피해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는 사람에게 당한 성폭력은 유죄 판결로 이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과도 맞닿아 있었다.

가해자는 연인만이 아니었다. '친구의 친구'와 직장 동료 등 다양한 관계가 등장했다. 사건 이전에 가해자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고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논문은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에도 '진짜 강간'에 대한 고정관념이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공격하는 사건을 전형적인 성폭력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강하면 연인이나 친구, 지인에 의한 성폭력은 피해자 자신에게조차 덜 심각한 사건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피해자는 경찰과 주변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예상해 신고를 포기할 수 있다.

세 가지 장벽은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니까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으로, '내가 그 사람을 만났으니 내 책임도 있다'는 생각은 자기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스튜어트 연구팀은 세 가지 장벽 밑바닥에 피해자를 탓하거나 특정 유형의 사건만을 '전형적인 성폭력'으로 간주하는 강간통념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분석했다.

■ "신고하라" 하기 전에... 다시 상처받지 않는 시스템부터

연구 결과가 던지는 정책적 메시지는 피해자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데 있지 않다. 신고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고, 오히려 더 상처받을 것이라는 예상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우선 경찰과 형사사법기관이 피해자 중심 접근(victim-centered approach.수사 편의보다 피해자 보호와 회복을 앞세우는 방식)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최초 신고를 받는 경찰관부터 수사 담당자까지 공감하며 대응하고, 피해자가 사건을 반복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시 외상을 겪지 않도록 트라우마 기반 대응(trauma-informed practice.피해자의 심리적 상처를 이해하고 2차 피해를 막도록 설계한 조사 방식)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수사와 기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가 연락할 수 있는 지원 창구를 두고 사건 진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영국의 독립 성폭력 피해자 지원관(Independent Sexual Violence Adviser.ISVA)처럼 외부 지원기관이 참여하는 경우에는 경찰.검찰.법원이 지원기관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연구팀은 강조한다.

그러나 공감하는 대응만으로 형사사법체계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논문은 사건 처리가 지나치게 늦어지지 않도록 하고, 실제 기소와 유죄 판결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어나야 피해자의 "신고해도 소용없다"는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지적한다. 처리 속도와 기소율의 개선은 최초 신고를 늘리는 것뿐 아니라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신고를 철회하는 경우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 경찰 교육만으로 부족... '피해자 탓' 통념까지 바꿔야

마지막 과제는 형사사법기관 밖에 있다.

피해자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는 사람에게 당한 성폭력을 '진짜 성폭력'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경찰 대응을 개선하는 것만으로 신고 장벽을 모두 없앨 수 없다. 연구팀은 피해자를 탓하거나 낯선 사람에 의한 폭력적인 공격만을 '진짜 강간'으로 보는 고정관념을 사회적으로 깨뜨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성폭력 통념 바로잡기 캠페인과 학교 교육, 직장 내 교육 등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경찰과 검찰 등 형사사법기관도 제도를 개선한 뒤 실제로 성폭력 신고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제도는 달라졌는데 피해자가 여전히 과거의 경험과 이미지에 기대 "신고해도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제도 개선이 실제 신고 증가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가 신고되지 않는 이유를 피해자의 '침묵'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튜어트 연구팀이 내린 결론이다. 피해자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를 묻기 전에 말했을 때 믿어줄 것이라는 확신을 줬는지, 말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상처받지 않도록 했는지, 가해자가 지인이어도 같은 성폭력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였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신고율을 높이는 출발점은 피해자에게 더 큰 용기를 요구하는 데 있지 않다. 피해자가 신고해도 괜찮다고 믿고, 형사사법 절차를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있다.

▶연구논문
Stewart, S., Willmott, D., Murphy, A., & Phillips, C. (2024). "I thought I'm better off just trying to put this behind me" - a contemporary approach to understanding why women decide not to report sexual violence. The Journal of Forensic Psychiatry & Psychology, 35(1), 85-101.

김지연(Jee Yearn Kim) Ph.D.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형사정책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법심리연구소 박사후 연구원으로, 생성형 AI 기술 역기능 및 사용자 위험 요인 대응 정책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범죄 행위의 심리학, 범죄자 위험 평가, 교정 개입 원칙, 형사사법 실무자 조직행동, 스토킹 범죄자 개입 등이다.


김지연 형사정책학 박사 cjdr.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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