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광장에선 촛불시민과 운동 세력이 융합했다

[촛불 1주년과 미디어 시민⓼] 2002년, 2004년, 그리고 2008년과 2016년이 달랐던 것 기사입력:2017-11-28 09:22:59
*촛불혁명 1주년이라 한다. 지난해 10월말 최순실 게이트 정국이 본격적으로 점화된 후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12월의 국회 대통령 탄핵안 가결과 올해 3월의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어냈다. 1주년을 맞아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진행 중이다. 로이슈는 그중에서 ‘미디어 시민’이란 개념으로 지난 이십여 년을 반추한 한윤형 저 <미디어 시민의 탄생>의 후반부를 소개한다. 박근혜 정부 탄생에서 몰락까지를 다룬 3개장을 9회에 걸쳐 연재한다.
22장 2016년, 네 번째 대규모 광장 촛불이 끌어내린 보수정부 (2)

대중이 거리에 거리낌 없이 나올 수 있게 되자 시위의 양상이 변하게 됐다. 꼭 촛불시위가 아니라도 그랬다. 참여정부 시절엔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와 한미FTA 반대 집회가 매우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적당히 섞인 시위대는 전경차 위에도 올라가곤 했지만, 더 이상 화염병·쇠파이프와 최루탄·전경방패로 대치하는 유사 군사작전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로는 각 정부마다 운동 세력들이 ‘흥행했던 대중 시위’를 한둘씩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김영삼 정부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우익 진영 일각에선 이러한 대중 시위가 좌익 운동 세력의 기획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그들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를 광우병에 대한 괴담을 좌익이 유포해서 만들어 낸 시위라는 이유로 ‘광우뻥 집회’라고 부른다. 하지만 좌익 운동 세력에겐 그와 같은 능력이 없다. 괴담이나 음모론의 유포를 충분히 막지 않거나 그들도 같이 믿어 버린 오류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들이 기획하고 선동한다고 사람들이 거리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02년에 그렇게 거리가 열리자마자 시민과 운동 세력 간의 갈등이 생기게 됐다. 이때에 거리로 나오게 된 대중은 이 책에 나오는 미디어 운동이 형성한 온라인상의 시민과 유사한 성격을 가졌고, 많은 경우 동일인이었다.

운동 세력이 대중을 제어하지 못함은 앞서 주대환의 진술에서도 보았듯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 이전의 항쟁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는 그러한 항쟁이 자주 일어나지 않았던 반면, 이제는 그 갈등이 만성적인 것이 되었다. 운동 세력이 범대위를 꾸리고 깊숙이 개입했던 2002년의 상황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고 촛불시위 때는 집행부 비슷한 것이 존재했다. 최초에 촛불시위를 제안한 누리꾼과 그의 제안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찾아와 결합한 몇몇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특정한 운동조직에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제각기 학생운동의 경험을 조금씩은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범대위와 참여 시민들이 갈등을 빚을 때 조율하려고 애썼다.

‘깃발 논쟁’이 그것이었다. 시위에 참여하는 운동조직들에게 깃발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딱히 소속된 단위가 없던 시민들에게는 그것이 ‘젠 체’하는 것, 자신들에게 소외감을 주는 것으로 느껴졌나 보다. 군중은 현장에서 “깃발 내려!”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운동조직들은 당황했다. 집행부는 양쪽에게 서로를 이해할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범대위에겐 너무 많은 깃발을 들지 말 것을, 시민들에겐 깃발을 이해해줄 것을 호소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깃발엔 금세 적응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때는 커뮤니티를 통해 주체화된 시민을 상징하듯 ‘다음 아고라’ 깃발이 등장했고, 2016년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시위 때는 딱히 소속 집단이 없는 이들이 ‘장수풍뎅이 연구회’ 같은 깃발을 만들기에 이른다.
2004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의 경우 운동 세력의 입장에선 다소 거리감이 있는 대중 집회였다. 좌파 단위에선 참여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누군가는 당시 시위 군중에 대해 “광화문 앞에 길 잃은 양떼들이 모여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촛불시민의 비중이 운동 세력을 압도한 집회였다.

최대의 갈등은 의외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였다. 우익 진영에선 운동 세력의 기획으로 보는 그 집회에서 정작 운동 세력들은 시민들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한미FTA 반대를 먼저 하고 그에 대한 논거를 만들어 왔던 것은 운동 세력이었으나, 촛불 시민들은 그들에게 적대적으로 굴었다. 돌이켜 보면 참여정부가 교체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참여정부가 운동 세력과 거세게 불화했던 앙금이 남아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2016년 촛불시위에서도 큰 역할을 한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2008년과 2016년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 (지금은) 서로 존중해주는 분위기다. 2008년에는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광우병 대책위보다 중·고등학생이나 비조직적으로 나온 시민들의 흐름이 주도적이었다. 활동가들은 혼도 나고 멱살도 잡히곤 했다. 내가 산증인 아닌가.(웃음) 11월 5일만 하더라도 시민단체 회원 등 조직대중은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시민, 네티즌들은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웠다. 혼자 온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강동구 모임’과 같은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무대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되면 깃발을 내리기는 하지만 깃발 자체를 공격하는 분위기는 줄어들었다. 비조직 시민들이 노동조합 조합원 등 조직대중에게 박수도 보내고 응원한다.

1987년이 운동권, 2008년에는 네티즌과 시민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이번에는 시민들의 자발성과 운동권의 조직력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퇴진행동도 시민들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함께 집회를 잘할 수 있도록 판을 열고, 연대하도록 돕는다는 생각으로 활동하고 있다. 1차 대회 때 여성비하 발언이 문제가 됐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참여할 수 있도록 무대에서의 발언 수칙을 정하고, 집회 인권 원칙도 발표했다. 이번 주는 박진 씨(다산인권센터 활동가이자 여성)가 사회를 본다. 연대의 질이 높다. 다양한 풀뿌리 시민단체, 동네 NGO, 지역 활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 (박은하 기자, “< 대통령 아직 안 물러났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경향신문》2016년 11월 19일자)

2008년의 시민들은 운동 세력을 경멸했고, 그들 없이도 본인들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있었던 앞선 두 시위와는 달리 이명박 정부하의 시위였기 때문에 경찰의 진압을 경험했다. 시위대가 많을 때에도 경찰은 거점을 방어하고 물대포를 쏘았고, 늦은 저녁이나 새벽녘에 사람들이 줄어들면 경찰이 돌격하여 사람들을 잡아 가두곤 했다. 시위대는 방어해야 할 거점이 없었기에 경찰을 피해 가거나, 잡힐 경우에도 ‘2박 3일 닭장차 투어’(경찰 호송차 연행을 빗댄 말)라고 하여 발랄한 방식으로 즐겼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승리할 수는 없었다. 2008년의 촛불시위대는 곧 궁지에 몰렸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시국미사로 시민들을 보위했다. 시국미사 과정에서 인용된 성경 구절인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는 훗날 윤민석의 노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의 첫 구절인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로 차용되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시위에서도 운동 세력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운동 세력은 사실 2015년 연말 1차 민중총궐기에서 백남기 농민이 쓰러졌을 때부터 정권 타도 시위를 확산하길 원했다. 하지만 백남기 농민의 치료 과정과 죽음, 그리고 사인 판정에 관련해서 미심쩍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2016년 10월 24일 JTBC 태블릿PC 보도로부터 10월 26일 《조선일보》의 <부끄럽다> 사설에 이르기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실 공방의 결정적 한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대중은 폭발적으로 광장에 몰려나왔다.

운동 세력은 대중을 불러낼 능력은 없었지만, 대중들이 쏟아져 나오자 기민하게 대응했다. 벌써 네 번째 겪은 일이고, 이제는 어느 정도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2015년과 2016년에 이르기까지 민중총궐기를 주최했던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여러 단체들을 끌어들여 박근혜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결성했고 바로 그 주 토요일인 2016년 10월 29일부터 촛불시위를 주최하기 시작했다. 10월 29일엔 주최 측 추산 5만, 11월 5일엔 35만이었던 참여 인원수는 원래 예정되었던 6차 민중총궐기와 겹친 11월 12일 106만으로 팽창했다(경찰 추산으로는 28만이었지만, 그 후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하여 당시의 시위대가 100만에 근접했음을 밝혔다). TV조선은 <슈퍼문보다 빛나는 100만 촛불>이라는 자막을 깔았고,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은 다소 섣부르게 ‘11·12 민주혁명’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다.

2016년 촛불은 겨울철 날씨와는 상관없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팽창했다. 11월 19일 주최 측 추산 96만이었던 촛불은 11월 26일엔 190만으로 팽창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를 이끌어냈다. 담화 직전까지 종편 방송은 하야 선언을 예측하고 있었으나 애매모호한 말뿐이었다. 결국 탄핵이 추진되었는데, 탄핵을 추진해야 할 정당과 의원들의 반응이 지지부진하자 12월 3일엔 전주 6만밖에 안 모인 것과는 딴판으로 전국적으로 232만(주최 측 추산)의 시민이 모여 촛불을 들었다. 경찰 추산으로도 43만이었던, 정부 수립 이래 사상 최대 규모 시위였다.

사람들은 주권자임을 선포했고, 권력자들에게 헌법정신을 지키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맞서고 있는 적이 강대함을 알았고 경계했다. 운동 세력과 시민은 더 이상 불화하지 않았다. 운동 세력은 훌륭한 행사 기획자였고, 열성적인 진행 요원이었으며, 시민들에게 익숙치 않은 시위 구호를 가르칠 때엔 종종 레크레이션 강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노고를 알았는지, 운동 세력이 종종 “노동개악 저지하라”와 같은 평소 시민들이 생각하지 못했을 법한 구호를 제시해도 곧잘 따라 외쳤다. 11월 초만 해도 팔박자 구호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 시민들이 12월 초엔 매우 열성적으로 시위를 즐기는 이들이 되었다.

데이터앤리서치 한윤형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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