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대법관은 이어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자만에 빠져 얄팍한 법률지식을 자랑으로 여기며 법관생활을 시작한 때의 교만했던 제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며 “법관으로서 가야 할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나 목표설정도 없이 첫 출발을 했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사 때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주변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때로는 소신도 감춰가며 요령껏 법관생활을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평소 명성이 높은 개선장군보다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 중에 더 머리 숙여 추모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 왔는데 법원을 떠나는 이 순간 묵묵히 봉사한 무명용사는커녕 후회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며 “사법권 독립이 보장돼야 하고, 법관과 법원의 권위가 존중돼야 한다는 등의 당연한 말조차 남기고 갈 자격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다”고 겸손을 이어갔다.
유 대법관은 “법적 분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는 국민을 위해 마땅히 했어야 할 봉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신속하고 공정하게 결론을 내려 주는 것은 법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덕목임에도 당사자가 주장하는 말을 자세히 듣거나 써낸 글을 끝까지 읽는 것을 갖고도 마치 시혜(施惠)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 “당사자의 처지를 전혀 고려함이 없이 저의 편의만을 생각해 재판기일을 정하고, 연기신청을 받아 주는 데는 인색하면서 직권으로 재판을 연기하기는 거리낌 없이 했으며, 충분한 기록검토와 휴식을 취한 후 맑은 정신으로 재판에 임하겠다고 다짐하고는 실천하지 못했고, 오히려 피곤한 몸으로 재판에 임하면서도 당사자의 주장이 장황하다고 탓하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무엇보다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권력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진정코 외쳤어야 할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침묵했으면서 정작 사법부에 대한 경청할 만한 비평은 외면한 채 ‘사법권 독립’이라든지 ‘재판의 권위’라는 등의 명분으로 사법부의 집단이익을 꾀하려는 것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는 움직임에도 냉정한 판단을 유보한 채 그냥 동조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라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는 그러면서 “환송을 받기보다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어려운 사건에 접해 고뇌하던 동료 법관들에 대한 격려에 인색하고, 빛도 없어 열심히 재판사무를 보조하고 법원조직의 순조로운 기능에 크게 기여하면서 묵묵히 사건당사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반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정성이 부족했던 것도 몹시 후회된다”고 덧붙였다.
유 대법관은 끝으로 “사법부의 어제와 오늘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청산하고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법원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이용훈 대법원장님을 사법부 수장으로 맞이한 만큼 국민으로부터 진정 사랑과 신뢰를 받는 새로운 모습의 사법부를 탄생시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 이제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법원을 떠나려 한다”고 석별의 정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