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인해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다수의 일제 요인들이 사망했다.
이후 일본제국주의에 침략당한 중국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하다니, 윤봉길 길이 빛나리"라 칭송하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선언을 한다.
이후 윤 의사는 폭탄 투척 직후 체포돼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져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됐다.
윤 의사는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채 미간에 총알을 맞고 서거했다. 시신은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됐다.
그는 사형 전 유언에서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니 하등 말할 바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