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철판에 깔린 후 포터에 실려 나오던 때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김종훈이 만난 하청노동자] 조선소 하청노동자 최도섭 씨 기사입력:2019-03-20 08:36:08
김종훈 국회의원이 조선소 하청노동자 최도섭 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훈 국회의원이 조선소 하청노동자 최도섭 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로이슈 전용모 기자]
“철판에 깔린 후 포터에 실려 나오던 때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김종훈이 만난 하청노동자] 조선소 하청노동자 최도섭씨

고 김용균씨의 죽음으로 하청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일어났지만, 똑같은 현실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조선소 하청은 전망이 없다”는 공공연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최도섭씨를 김종훈 국회의원이 인터뷰 했습니다.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설렘, 큰 배를 내 손으로 만들었다는 보람, 가정을 책임질 수 있겠다는 기대감, 차별적인 노동환경에 대한 서러움’ 등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하청노동자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조선소 노동자가 되다”

김종훈 :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최도섭 : 현대중공업 협력업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기장부, 배관 쪽 일을 합니다. 처음 시작한 건 2001년쯤이니까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중간에 2년 정도 다른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종훈 : 오랫동안 이 일을 하셨습니다. 쉽지 않으셨을텐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최도섭 :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원래 하고 있던 개인사업이 IMF시절 결재대금으로 받았던 어음이 부도나면서 어려워졌고, 부산조선소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처음 해 보는 일이라 고생도 많이 했지요.

배의 엔진부분을 수리하는 일을 했는데, 엔진을 들어내고 그 안에 오래 부식된 부분을 갈고 다시 조립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기계가 없어서 사람들이 직접 줄을 당겨야 했는데 잘못하면 그 줄에 팔이 끼어 큰 사고가 나기도 했습니다. 워낙 위험한 일이다 보니, 당시 선배들은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라고 고함지르고, 망치가 날아오기도 하고, 험한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 겪는 현장 분위기에 놀라기도 했고, 엔진 안에 들어가서 걸레로 청소하고, 매일 기름덩어리를 만지니까 기름독도 오르고,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가렵고, 피부에 뭐가 올라오고 해서 2년 정도 일하다가 그만 두고 나왔어요.

다른 일을 좀 했는데, 경기가 어려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때 막내 동서가 소개를 해 줘서 현대중공업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먼저 와서 일하다 가족들도 곧 이사를 왔고, 여기 입사한 게 2006년 2월이니까 햇수로 벌써 14년입니다.

김종훈 : 나고 자라던 동네를 떠나 낯선 곳으로 와서 정착하기까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큰 결심을 하고 오셨겠네요.

최도섭 : 아이도 있고,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었으니까요. 조선소 일을 해본 경험도 있었고 그 때 나이가 서른 중반이었습니다. 현대중공업은 대기업이니까 제가 협력업체 소속이긴 해도 열심히만 하면 기술도 배우고, 자리 잡으면 먹고사는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 싶었죠. 일만 잘하면 직영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고.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습니다.

처음 출근했을 때, 난생 처음 그렇게 큰 배를 눈앞에서 보고 저 배를 내가 만든다는 생각에 기대도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했고, 처음엔 걸어서 출근하다가, 자전거를 사서 출근하게 되고, 이후에는 오토바이로 출근하면서 점점 여건이 나아진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집도 부산에서 월세방에 있다가 울산 와서 전월세, 또 전세로 옮기게 되어서 일은 좀 힘들어도 나름 희망이 있었습니다.

“철판에 깔린 후, 포터에 실려 나오다”

김종훈 : 산재사고가 있었습니까? 현대중공업에서는 사고가 났다 하면 중대재해가 많은데, 어떤 사고였습니까?

최도섭 : 큰 사고였습니다. 배 모양을 보면 외판 쪽인데, 외판을 탑재하다가 위에 ‘훅’이라고 있어요. 그게 돌아가면서 덮쳐 버린거죠. 외판이 11톤쯤 되요. 골반뼈가 완전히 으스러지고, 장이 파열되고, 하반신 전체가 완전 망가졌습니다. 그나마 그 철판에 깔리지 않아서 살았지 아니었다면 아마 살기 어려웠을 겁니다. (2010년 3월 15일 사고)

김종훈 : 산재처리를 꺼리는 업체들이 많은데, 과정에 문제는 없으셨습니까?

최도섭 : 지금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사고를 당하고, 더블포터 짐칸에 실려 나왔습니다. 구급차가 들어오면 현장에서 사고 난 게 바로 확인되니까 하반신이 엉망이 된 저를 족장으로 들어 올려 포터 짐칸에 싣고, 제 양옆에 한 사람씩 붙어서 저를 붙잡아 앉아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나왔습니다.

제가 일하던 업체 지정병원으로 옮겼는데 그 병원에서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 해서 다시 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누워 있는데, 2시간이 넘도록 아무 치료도 하지 않더란 말입니다. 한참 후, 의사 한 분이 오더니 집에 있다가 2층에서 떨어졌다고 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업체 총무라는 사람이 와서 일하다가 다쳤다고 하지 말고 집에서 다쳤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면 병원비랑은 회사에서 다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나마 제가 그 때 의식이 있어 항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리냐고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이거 지금 마스크 자국에다가 안전화를 신고, 작업복 시커멓게 이렇게 왔는데 왜 집에서 다쳤다고 하라고 하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노조에서도 와서 항의하고, 떠들썩해 지니까 안 되겠다 싶었는지 산재로 처리해 주더라고요.

장이 파열되고 하반신이 엉망으로 부서져 사람의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데도, 치료를 미룬 채 산재처리 안하려고 2시간이나 시간을 끈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개돼지보다 못한 현실을 경험한거죠.

김종훈 : 일하다 다친 사람을 산재처리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데 업체들은 산재처리하면 처벌이나 감독 대상이 되고, 산재보험료도 오르고 하니까 공상처리하려는 꼼수를 쓰는 것이죠. 다시 복귀해야 하는 노동자로서는 그런 요구를 거부하기 쉽지 않습니다. 정말 문제가 심각합니다. 치료는 잘 되신거죠?

최도섭 : 2년 가까이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산재처리를 해서 휴직급여가 나오긴 했지만, 2년 동안 누워 있다 보니 그 사이 빚이 많이 생겼습니다. 얼른 일어나 복직하려고 애를 썼지요. 22개월 지나고 다행히 복직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인텨뷰에 응하고 있는 최도섭 씨.
인텨뷰에 응하고 있는 최도섭 씨.

김종훈 :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큰 사고를 겪고 나서 보통 노력으로는 어려웠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직장에 복귀하는 과정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어떠셨습니까?


최도섭 : 쉽지 않았습니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복귀 가능하다 했는데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로 일을 안 주는 겁니다. ‘알다시피 여기 일이 위험하니까 몸도 성치 않은데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하며 다른 직장을 알아보라는 식의 권유가 이어졌습니다. 어느날은 총무가 찾아와서 사내 출입증이 변경됐다면서 달라고 했습니다. 뭔가 미심쩍었지만 줬더니 안 돌려주더라고요. 출입증이 없으니까 회사 내로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너무 부당하고 억울하다. 회사 복귀를 위해 일단은 한번 싸워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사내로 들어가는데 성공했습니다. 업체 탈의실에서 기다리는데 하청업체 관리자가 와서 ‘오지 마라 했는데, 왜 왔냐.’고 쫒아내려 했습니다. ‘탈의실 청소라도 하며 1시간이라도 일하고 나가겠다.’며 버텼습니다.

“힘들게 복직했지만 업체의 잇따른 폐업”

김종훈 : 평생 후유증에 시달릴 텐데, 제대로 보상해줘도 시원찮을 판에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서 싸우기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최도섭 : 그 때 하청노동조합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저랑 같은 업체 다니다가 해고된 동료가 있는데, 그 동료가 당시 하청노조 지회장이었습니다. 제가 치료받는 기간에 빚이 많이 생겨서 고민하고 있는데, 개인회생절차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복직문제로 싸울 때도 옆에서 많이 도와줬고요. 그래서 복직과정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결국 복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산재사고 났을 때도 그렇고 현장에서 알게 모르게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답답하지만 그냥 지나가고 참고 그랬습니다. 복직 과정에 싸우면서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면 항의하고 내 권리는 내가 스스로 주장하고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복직 후에 하청노동조합에 가입도 했습니다.

김종훈 : 복직 후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최도섭 : 힘들게 복직했는데 얼마 안 가서 다니던 업체(**ENG)가 폐업을 하고 말았습니다. 폐업 후 **ENG 총무를 하던 사위가 새로운 업체(ㅎ기업)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 일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고용승계 되었는데, 저만 빠졌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하청노동조합 조합원이라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그 때 제가 노동조합 조합원이라는 걸 다 알았거든요. 노조활동도 하고 투쟁이나 집회에도 나가고 하니까 사람들이 볼 거 아닙니까. 제가 또 열성적이기도 했고요.

그 때 저처럼 승계가 안 된 사람들이랑 찾아가서 항의해서 겨우 들어갔더니 또 1년 만에 폐업을 했습니다. 새로운 업체(**테크)로 넘어가고, 그 쪽에서도 안 받으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또 싸웠죠. 중식 때 마이크 잡고 현장 안에서 떠들고 그런 식으로 싸워서 고용승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1년 만에 업체가 폐업되었습니다.

이 때가 2015년 16년쯤이었는데, 폐업 후 고용승계 되는 과정이 상당이 어렵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사무실 밑에서 저하고 다른 조합원 한 명하고 둘이서 진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집안 사정도 어려웠고, 부인이 종양 때문에 수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농성장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회사 밖으로 나가는 순간 출입증이 말소됐기 때문에 들어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밤마다 사측 경비 40여명이 저를 회사 밖으로 내보내려고 잡으로 왔습니다. 도망 다니다 잡혀서 동부경찰서로 끌려간 적도 있어요. 조사 받고 나와서 몰래 또 들어왔죠. 그런 식으로 현장 안에서 56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식을 했습니다. 단식 13일쯤 되니까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나는 더 하고 싶은데, 다들 안 된다고 말려서 결국 중단했습니다.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농성을 했습니다. 1년 동안 한겨울에 침낭 하나 덮고 비바람 맞으면서 고용 승계를 위한 농성을 했어요.

김종훈 : 정말 산 넘어 산, 끝없는 싸움의 연속이셨군요. 끊임없이 부딪치고 싸우고,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나고 어떻게 그렇게 해 오실 수 있었나요?

최도섭 : 가장 최근에 다니던 회사가 폐업했을 때입니다. 당시 그 업체 인원수가 많아서 폐업 후 2개 회사로 나뉘었어요. 이번에도 또 저를 못 받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왜 못 받느냐. 소장, 팀장 모두 일에 대해, 성실성, 근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왜 못 받느냐’ 하니까 ‘죄송하다 미안하다 제가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고용승계를 거절당하고 정말 많은 고민 끝에 골리앗에 올라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집사람한테 나는 이제 집에 못 온다고 이야기도 했어요. 근데 그 때 회사동료들이 나서 고용승계를 위한 탄원서를 다 적어주더라고요. 탄원서를 적으면 그게 결국 회사에 다 들어가고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들이 탄원서를 모아다 준 것이죠. 그래서 복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제가 계속 싸워왔던 건 부당한 거, 억울한 걸 참지 않겠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처음엔 겁나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습니다. 하청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나서 한 때는 왕따처럼 커피도 혼자 먹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 어느 새 제 주변에 동료들이 있고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있는 겁니다. 그 힘으로 버텼고 또 해나가야죠.

김종훈 :그 분들에게는 최도섭님이 희망이었을 겁니다. 일자리 잃을까봐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하고, 억울함이 있어도 말 못하는 게 현실인데, 부당한 일에 항의도 하고, 탄압 당하면서도 싸우고 또 싸우고, 그렇게 해서 요구를 관철시키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속이 후련하고 힘이 났겠습니까.

“이제는 외롭지 않아요”

김종훈 의원과 최도섭 씨가 파이팅을 하고 있다.(사진제공=김종훈의원실)
김종훈 의원과 최도섭 씨가 파이팅을 하고 있다.(사진제공=김종훈의원실)

김종훈 : 요즘 생활은 좀 어떠십니까?


최도섭 : 생각해 보면 이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거 같기도 합니다. 현대중공업 안에서는 ‘최도섭’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협력업체에서 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수요일마다 출근길 출입문 앞에서 하청노동조합 소식지를 나눠 주는데, 예전에는 사람들이 받기를 꺼려해 유인물을 내밀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는데, 이제는 저만 보면 먼저 달라고 합니다. 현장 안에서도 임금이 체불되거나 퇴직금을 못 받거나 하면 저한테 찾아옵니다. 그러면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노동조합 가입도 권유합니다.

싸우는 과정에 원청 관리자를 포함해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저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되겠다’ 생각하는 거 같아요. 제가 최씨 아닙니까. 최고집~ (웃음)

이전에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간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다시 점심시간 같은 때 모이고, 지나가다 보면 껌이라도 하나 주는 식으로 동료들과 함께 현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찾아야한다.”

김종훈 :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을 해주십시오.

최도섭 : 하청노동자로 조선소에 다니게 되면 자기 꿈을 못 펼치는 거 같아요. 진짜 짐승처럼 하라는 대로 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말 못하는 현실. 저도 지금까지 싸워 왔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회사가 간섭 안하고 저를 내버려 두지만, 회사가 언제 또 내 등에 칼을 꽂을지 하는 두려움을 가집니다.

하지만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권리는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정말로 느낀 게, 부당한 일을 당하면 부당하다고 말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억울하다고 말해야 된다는 것.

내가 얘기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뭉쳐야 돼요. 똘똘 뭉쳐도 쉽지 않은데 개별적으로는 정말 힘들어요.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나서기 어려운거 알아요. 그리고 싸운다 해서 한 번에 확 바뀌기 어렵다는 것도 알지만 우리가 모여야 힘이 생기고 잘못된 점들을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지난 2000년대 들어 우리나라 조선 대자본은 사내하청 노동자를 크게 늘렸습니다. 조선업 규모가 커지는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수는 큰 변동이 없었지만 사내하청 노동자 수는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조선 대자본이 운영 자본을 절약하고 노동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노사관계 전략으로 삼았던 탓이 클 것입니다.

이렇게 증가한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임금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고, 노조를 조직하기도 어려웠으며, 무엇보다 더 위험한 일을 떠맡아야 했습니다. 조선산업의 중추를 떠맡고 있는 하청노동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장기적인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용모 기자 sisalaw@lawiss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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