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장준하 선생 사망

기사입력:2018-08-17 08:26:26
[로이슈 심준보 기자]
1975년 8월 17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였던 장준하 선생이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향년 57세.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한 장준하 선생은 학생 시절 친구인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와 함께 일본어 교과서 찢기 운동을 주도했다. 이어 교육 활동에 힘쓰다 1944년 1월 일본군에 자원입대의 형식으로 강제징병됐으나 그해 7월 장쑤 성 쑤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군 중앙군 준위가 되었다.

1945년 쓰촨 성의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 광복군 장교로 복무했다. 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장준하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했다. ‘사상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의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파,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았다가 국가원수 모독죄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신민당과 윤보선과 함께 국민당에서 활동했다. 1967년부터는 7대 국회의원을 지내 국방위에서 활동했다.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당시 유신정권은 하산 도중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1993년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했지만 아직까지 타살 여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심준보 기자 sjb@rawissue.co.kr

주식시황 〉

항목 현재가 전일대비
코스피 2,746.63 ▲0.81
코스닥 905.50 ▼4.55
코스피200 374.63 ▲1.41

가상화폐 시세 〉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99,870,000 ▲370,000
비트코인캐시 891,000 ▲44,500
비트코인골드 70,400 ▲2,050
이더리움 5,059,000 ▲24,000
이더리움클래식 48,470 ▲2,750
리플 897 ▲21
이오스 1,586 ▲41
퀀텀 6,835 ▲130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99,993,000 ▲393,000
이더리움 5,067,000 ▲29,000
이더리움클래식 48,350 ▲2,610
메탈 3,133 ▲31
리스크 2,845 ▲20
리플 898 ▲22
에이다 933 ▲20
스팀 499 ▲8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99,801,000 ▲322,000
비트코인캐시 889,500 ▲43,500
비트코인골드 70,850 ▲2,900
이더리움 5,058,000 ▲23,000
이더리움클래식 48,390 ▲2,650
리플 897 ▲20
퀀텀 6,820 ▲130
이오타 500 ▲4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