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보호관찰소 김태섭 계장.
이미지 확대보기필자가 공직에 첫 발을 내디딘 지 만 20년이다. 그간 보호관찰소 선배들이 따로 “청렴해야 한다. 비리에 연루되어서는 안된다, 부당한 공권력을 남용해선 안된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러한 조직과 직장문화를 흡수해 내면에 저장돼 있었나보다.
9년 전 울산보호관찰소에서 서무계장을 할 때 청사 커튼을 모두 교체하는 계약을 진행했다. 계약 후 며칠 뒤 공사가 진행됐고 공사 첫 날 아침 업체 사장이 찾아와 상품권이라며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필자는 업체사장님에게 “일하시는 분들 한 푼이라도 더 챙겨 드리세요.”라며 정중히 거절을 했다.
또 5년 전 창원보호관찰소 조사과에 근무할 때 일화다. 당시 성폭력 사범에 대한 소급 청구 전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김해의 대상자 주거지를 방문했다. 그 친구는 20대 후반의 미혼남성으로 부모의 아파트에 부모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 내게 두툼한 봉투를 하나 건네려 했는데 언뜻 보기에도 거금이 들어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교육청에서 사무관으로 정년퇴임했다. “아버님 지금은 아버님이 사셨던 시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이 돈을 주시지 않으셔도 아드님은 정당한 조사결과에 의해 처분을 받을 겁니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이외에도 20년간 근무하면서 두 차례 더 금품을 전달하려던 것을 거절했던 기억이 있다.
단속이나 인허가권을 가지지 않은 보호관찰소라 20년간 네 차례 밖에 이러한 뇌물제공 시도가 없었지 만약 그러한 권력기관에 있었다면 얼마나 부정부패와 유혹에 시달렸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글 서두의 최근 사회분위기와 인식의 변화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년간 네 차례 금품을 거절했던 필자도 딱 한 번 보호자의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을 때가 있었다.
사무실에서 면담을 진행하면서 강화도에서 온 중 1학년 남학생의 보호자가 방금 밖에서 만났다던 그 노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소년에게서 듣기로는 자기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4학년 때는 어머니마저 가출해 버려서 그 후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으며 할머니가 남의 밭일을 나가 어렵게 생계를 꾸려 왔다고 한다.
소년의 얘길 들으면서 초등 6학년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울산에서 경주 우리집으로 오실 때면 늘 가방 할머니의 손수건에 박하사탕을 꼬깃꼬깃 말아오시던 외할머니. 나의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렇게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불현듯 밖에 계신 할머니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살며시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가니 할머니는 검정색 비닐을 가슴에 꼬옥 안고서 여전히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에게 다가가 “○○이 할머님, 뭘 이렇게 사오셨어요?”라고 여쭙자, 할머니는 멋쩍게 웃으시면서 “강화도에 고구마를 많이 해요, 남의 고구마 밭에 일 나갔다가 받은 고구마를 좀 쪄왔어요, 우리 ○○이 잘 좀 봐주이소.”라며 다시 검정색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필자는 그 비닐봉지를 받으면서 “네 할머님. ○○이 잘 보살필게요. 고구마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라며 넉살 좋게 웃어보였다. 그때 강화도 고구마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았던 보호자의 선물이었다.
국민의 공복으로서 누구보다 본보기가 되어야 할 공무원이 횡령, 뒷돈을 받는 뉴스를 접할 때면 너무도 안타깝고 부끄럽다. 이제 우리 공무원들도 달라져야 한다. 공무원 스스로가 청렴의 향기를 풍기며 국민의 믿음을 받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자.
-창원보호관찰소 김태섭 계장
전용모 기자 sisalaw@lawiss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