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는 종편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촛불 1주년과 미디어 시민⓵] 나꼼수와 종편, ‘미디어 시민’의 영역을 확장하다 기사입력:2017-11-03 10:25:51
*촛불혁명 1주년이라 한다. 지난해 10월말 최순실 게이트 정국이 본격적으로 점화된 후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12월의 국회 대통령 탄핵안 가결과 올해 3월의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어냈다. 1주년을 맞아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진행 중이다. 로이슈는 그중에서 ‘미디어 시민’이란 개념으로 지난 이십여 년을 반추한 한윤형 저 <미디어 시민의 탄생>의 후반부를 소개한다. 박근혜 정부 탄생에서 몰락까지를 다룬 3개장을 향후 9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20장 나꼼수와 종편, 2012년 대선과 박근혜 시대를 열다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와 종합편성채널은 둘 다 이명박 정부의 산물이다. 전자는 이명박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나타난 결과물이고, 후자는 이명박 정부가 적극적으로 법안을 제정해 주면서 만들어 낸 신문 기업의 새로운 사업모델이었다.

2011년에 탄생한 두 종류의 매체는 대안미디어와 법안으로 보장된 미디어라는 큰 차이가 있었고 정치 성향도 양극단이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이명박 정부 말기와 2012년 대선에 영향을 미쳤고 박근혜 정부의 미디어 환경을 규정했다. 또한 지나서 보니 함께 묶어서 논의될 만한 공통점이 있었다.

김어준은 이 이야기의 도입부에서부터 등장하는 사람이다. 강준만이 무크지 《인물과 사상》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고 월간 《인물과 사상》을 창간하던 1998년 무렵, 김어준은 《조선일보》 인터넷 홈페이지(당시엔 ‘디지털 조선일보’라고 했다) 화면을 패러디하여 《딴지일보》란 웹진을 개설했다. 해당 시기에 충분히 서술하지 못 했지만, 《딴지일보》는 곧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고 출판물로도 나와 한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인 패러디 미디어’로 출발한 《딴지일보》는 그에 합류한 필진과 독자들의 커뮤니티로 말미암아 21세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사실상의 매체로 성장했다. 김어준은 ‘딴지그룹의 총수’를 자칭했고, 이후 흔히 ‘김총수’라고 불렸다. 내부 커뮤니티 중 하나였던 ‘영진공’(영화진흥공화국)이나 ‘남로당’(남녀불꽃로동당)의 경우 김어준과도 독립적인 영향력을 지닌 단체로 자라났고, 오늘날에도 별도의 팟캐스트 방송이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즉 한때 《딴지일보》의 영향력은 ‘김어준 총수’의 그것을 훨씬 상회했다.

그렇더라도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는 ‘김어준 총수’의 전형을 보여주는 기획콘텐츠였다. 김어준은 2007년 대선에서 국민들이 이명박에게 속아서 표를 줬다고 판단했던 것 같고, 과거 17대 의원이며 ‘BBK 저격수’였고 실형을 살 위기에 있었던 정봉주 전 의원과 친분이 있었다. 처음엔 김어준과 정봉주 두 사람이 떠드는 방송이었다. 그러다가 시사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시사IN》의 역량 있는 사회부 기자인 주진우가 합류하게 됐고, 이후 PD인 김용민까지 묶여서 ‘나꼼수 4인방’으로 불리게 됐다.
‘나꼼수’의 인기도 뉴미디어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이튠즈 팟캐스트 전용방송이었던 이 방송의 성공은 한국에 팟캐스트 방송이 난립하는 계기가 됐다. 대한민국 정치·시사 팟캐스트의 시발점이었다. 전체 팟캐스트 다운로드 세계 1위를 달성한적이 있으며, 리얼미터가 조사해서 추정한 바에 따르면 600만 명 가량이 청취했을 거라고 했다. 출퇴근길이 긴 직장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쉽다는 것이 팟캐스트의 장점이었는데, 김어준 포함 4인방의 입담과 개그, 분석력이 어우러져 대중적인 히트를 쳤다.

비판도 있었다. 조롱이 너무 심하다든가, 정부 당국의 행위를 추론하면서 지나치게 음모론적으로 간다거나, 정치적으론 지엽말단적인데 선정적인 얘기에 집착한다는 점이 주로 지적됐다. ‘나꼼수발 특종’으로 알려진 것들이 꼼꼼히 검증해 보면 이미 나왔던 얘기거나, 주장 그대로 검증된 것은 아니란 지적도 있었다. 당시엔 문화평론가 진중권과 영화평론가 허지웅 등이 이러한 지적을 했다가 대중의 반발을 샀다. 나꼼수를 통해 정치에 새로이 관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은 일종의 팬덤을 형성했고 진중권이나 허지웅과 같은 기존 진보지식인이 그들을 질투한다고 봤다. 비판에 반박하는 대신 그 원인을 ‘질투’로 해석하는 조류는 이때에 처음 등장한 것 같은데,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꼼수 비판자들에 대해 “나꼼수에 열폭하지 마라”고 말하곤 했다.

나꼼수가 사람들에게 확실히 도움이 된 부분은 ‘뉴스 해설’의 영역이었다고 생각한다. 뉴미디어 시대는 뉴스 범람의 시대이기도 했다. 쏟아지는 뉴스 중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저 뉴스의 함의는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생활인들에게 그 뉴스들을 교차검증하면서 정치적 관심에 걸맞는 정보를 추출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꼼수는 그런 이들에게 등장하여 자신들의 해설을 신뢰하면 정치의 맥을 짚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꼼수가 얼마나 양질의 정보를 제공했느냐와는 별도로, 그들이 그 시대 대중의 필요를 정확하게 짚고 그를 통해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었다.

누구도 언급한 바는 없지만 나꼼수란 방송의 형식은 종합편성채널의 정치·시사토론의 형식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된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선 나꼼수와 유사한 형식의 시사토크 프로그램을 앞 다투어 만들었다. 사실 초기 종편방송에서 시사토크 프로그램의 비중이 높았던 것은 경제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스튜디오와 패널 섭외만 이루어지면 제작가능한 값싼 방송이었고, 그리하여 시사보도의 비율을 낮추라는 관계 당국의 지적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나꼼수의 형식은 저렴하면서도 일정 부분의 시청률을 담보하는 프로그램을 급히 만들어야 했던 종편들에게 영감을 준 셈이다. 말하자면 종편의 시사토크 프로그램은 ‘중·노년층을 위한 나꼼수’가 되었다. 나꼼수와 종편은 그렇게 ‘미디어-시민’에 편입되기를 어려워하던 이들을 미디어 시민의 틀에 편입시켰다.

그 당시로는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었지만, 종편이 걷기 시작한 길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참여정부 시절 유행했던 YTN의 <돌발영상>이란 것이 있었다. 이는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주로 인터넷 중심으로 젊은 층들에게 소비되었다. 중·노년층은 종이신문, 그중에서도 조중동에 나오는 정보만을 접할 수 있었다. 중·노년층과 청년층 사이에 접하는 정보의 종류와 양에서 격차가 생긴 상황이었다. 하지만 종편이 시사토크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면서 그들은 타사 보도에 대해서도 부지런히 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이너매체에 나왔다 하더라도 의미있거나 선정적인 정보는 종편 스튜디오에서 패널들의 해설과 함께 공개되게 되었다. ‘단독’과 ‘특종’의 의미가 약화되고 ‘소개’와 ‘해설’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변화한 미디어환경이 없었더라면 2016년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 탄핵국면에서 ‘언론 연합군’이 정부를 압박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한윤형 데이터앤리서치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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