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도할계(牛刀割鷄)

기사입력:2017-02-15 16:14:48
심종기 칼럼니스트
심종기 칼럼니스트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이었다. 그것도 관기였다.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어머니였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도의 나라였다.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명이라도 천민이면 자식들은 자동적으로 천민이 되었다. 천민은 백성 취급도 받지 못했다. 주인을 위해 일하다가 죽는 牛 만도 못한 신세였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관가에서 일을 했다. 농기구를 고치거나 병기를 수리하는 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주를 높이 산 남양 부사 윤사홍의 추천으로 궁중에서 일을 하게 된다. 조선시대 왕들의 고민은 한결 같았다. 기근(饑饉)에서 백성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에만 의존했던 농사기술로는 기근을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었다. 가뭄, 홍수, 한파, 태풍, 병충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중에서도 가뭄은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 경작지가 천수답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의존해야 했다. 왕이나 대신이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천지신명께 비는 것이었다.

세종은 농업기술을 혁명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하늘에 의존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했다. 농업의 과학기술화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시간 측정, 계절별 강우량 측정, 천체에 대한 해석이 필요했다.

궁중으로 들어온 관노의 아들은 재주가 비상했다. 그의 손을 거치면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점점 소문이 나고 그 소문은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세종은 그를 불러 천문관측기구를 만들게 하였다. 그것이 簡儀(간의)다.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천민이던 그를 발탁해서 벼슬을 내렸다. 그에게 벼슬을 하사하는 과정까지는 순탄하지 않았다. 임금이니 일방적으로 명을 내릴 수도 있었지만 세종은 그러하지 않았다. 중신들의 완강한 반대를 설득하고, 중의를 모으는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세종은 명나라에 의존하던 조선의 과학기술을 자주적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런 세종의 의지를 중신들도 알고 있었다.

신분질서가 지엄했던 시절 세종은 스스로 그 권위를 낮은 곳으로 향했다. 세종은 늘 백성의 편에 서고자 했다. 그래서 식량 자급자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다. 세종은 천민인 그에게 면천을 해주고 중임을 맡겼다. 세종이 아이디어를 내면 그가 설계를 하고 시공을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가 된 〈자격루〉다. 자격루의 발명은 후에 〈옥루〉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옥루〉는 자격루와 혼천의를 결합한 자동시계다. 이 자동시계의 발명은 시간과 계절을 정확하게 알려줌으로써 농사기술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지역별 벼와 보리를 심는 시기를 과학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10,000원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혼천의〉는 천문과학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천체의 좌표를 관찰하는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는 조선 과학기술이 명나라를 뛰어넘는 계기가 되었다. 세종이 통치하던 시대는 조선시대 중 문학, 과학, 예술의 르네상스시기였다, 또한 부국강병(富國强兵)하여 전쟁도 적었고, 사화도 없었고, 농업생산성도 높아 백성들은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았다. 농업과 과학의 접목은 세종의 의지와 세종이 발굴한 그와 함께 이루어 낸 찬란한 업적인 것이다. 그의 이름은 조선의 발명왕으로 불리는 蔣英實(장영실)이다.

『우도할계(牛刀割鷄)』란 말이 있다. “소 잡는 칼로 닭은 잡는 다는 뜻”이다.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작은 일을 하도록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릇이 항아리인데 간장종지 역할만 하게 한다면 아까운 인재를 사장시키는 것이다. 장영실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졌어도 그를 발탁하지 않았다면 동래현에서 무기나 농기구를 고처주고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임에도 천민인 장영실을 발탁하여 조선 과학의 르네상스를 이끌게 한 세종의 탁월한 인재발굴역량은 지도자라면 마땅히 배워야 할 덕목이다. 세종의 한글창제나 집현전의 역할도 세종의 깊은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세종은 능력을 평가할 때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썼고, 책임과 함께 권한도 대폭 위양했다. 그래서 동례 현에서 병장기 수리나 하면서 평생을 보내야 했을 장영실에게 국가의 과학기술을 이끄는 책임자란 큰 칼을 쥐어줬기 때문에 조선시대 과학의 르네상스 시대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도자는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구안〉이다. 특히 인재 발굴 및 운용에 대한 선구안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핵심의제다. “소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닭을 잡는 일(牛刀割鷄)”을 시킨다면 인재를 죽이는 일이고, 또한 “닭을 잡는 칼로 소를 잡으라고 권한과 역할을 준다면(鷄刀割牛)” 나라가 온통 아비규환이 된다. 인재는 적제적소에 써야 하고 능력과 잠재력에 부합하는 책임을 부여해야 하는데 거꾸로 된 인사정책으로 인하여 현재까지도 국민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 닭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소를 잡는 권한을 주어 도탄에 빠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에 해당하는 인물의 으뜸은 조선시대 무오사화를 주도한 유자광이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종의 아들 세조는 아버지와 정 반대의 인재를 등용했다. 태생이 쿠데타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조등극의 제 1등 공신 한명회도 유자광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유자광은 서얼출신이다.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중신들을 겁박하여 유자광을 중용한다. 과거에 낙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직접 1등으로 낙점하여 장원급제를 시켰다고 한다. 조선의 2대 간신하면 유자광과 임사홍을 일컫는 이들이 많다. 유자광은 고변과 음해 그리고 논쟁을 일으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의 세치 혀에 조선 선비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남이장군을 역모해서 죽이고,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이 부관참시다. 연산군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유자광은 자신의 주군인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다시 주도한다. 닭을 겨우 잡을 수 있는 유자광의 재능을 세조가 발탁하여 소를 잡도록 해서 만든 참담한 역사적 비극이다.

지도자는 인재발굴에 얼마나 신중하고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닭 잡는 정도의 칼을 소를 잡도록 잘 못 배치한 것은 아닌지, 소를 잡는 칼로 닭을 잡도록 한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소 잡는 칼로 소를 잡고(牛刀割牛), 닭 잡는 칼로 닭을 잡도록(鷄刀割鷄) 하는 것 그것이 인사가 만사가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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