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교수 ‘부러진 화살’ 고뇌하는 이정렬 부장판사

“복직소송 판사 세 명 이견 없는 만장일치 김명호 승소 의견이었다” 기사입력:2012-01-26 15:37:42
[로이슈=법률전문 인터넷신문] 사법부 권위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영화 <부러진 화살>로 다시 화제를 낳고 있는 이른바 ‘판사 석궁테러’의 시발점이 된 김명호(55) 전 성균관대 교수의 복직소송 항소심에서 주심을 맡았던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가 고뇌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석궁사건 형사재판 과정을 핵심으로 다룬 <부러진 화살>이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엉뚱한 불꽃이 민사재판을 진행한 자신과 재판부에게 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정렬 부장판사는 25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생뚱맞은 공격을 하는 언론과 일부 오해하는 법원가족(법원공무원)에 대해 불신감을 드러내며 자신이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음을 피력했다.

이정렬 부장판사(사진=페이스북) 이정렬 부장판사는 먼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너무나 화가 나 있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와 관련해 그동안 너무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론계 종사자라고 우기면서 자기들 편한 대로 전혀 사실과 다른 소설을 쏟아내고 모함을 해대는 사람들, 입장표명이나 거취표명을 하라고 악다구니를 써 대는 사람들...”이라며 언론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일부러 외면했고, 참았다. 제게 왜 할 말이 없겠습니까? 책으로 써도 될 만큼 너무나 많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입장표명이니, 거취표명이니 이런 것은 정치인들이나 하는 것이지, 정치인도 아닌 제가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그 사건에 관해 다시 언급을 한다면, 필경 김명호 교수의 이런 저런 소송수행상의 잘못 때문에 패소를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될 것인데...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제가 한 판결 때문에 상처를 한 번 받은 분이니, 저에게는 그 분의 잘못을 언급함으로써 다시 상처를 가할 권리가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쏟아지는 온갖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었다”고 적었다.

이 부장판사는 “게다가 패소한 당사자가 테러를 했다는 이유로, 또 그것이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는 이유로, 판결의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와 경위를 판결문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밝히게 된다면, 앞으로 패소한 사람들은 판결문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판사에게 테러를 하려고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고 말을 아낀 이유를 설명했다.

또 “숨길 수 없는 솔직한 마음은, 차라리 억울함과 답답함을 속으로 삭이고 말지, 괜히 말 한 마디 했다가 저도 석궁을 맞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라며 “품위 없게도 요즘 유행하고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저는 무척 쫄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장판사는 “그런데 몇몇 법원가족께서 제게 보낸 메일 내용을 보고서 너무나 분통이 터졌다”며 “누구의 지시를 받아 짜맞추기식 엉터리 판결을 했냐, 지시한 사람이 청와대라는 둥, 대법원장님이라는 둥, 박홍우(당시 재판장) 원장님한테 한 마디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는 둥...엉터리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는 민사사건에만 관여한 제게 왜 (석궁사건) 혈흔감정도 안 하고, 부러진 화살도 증거물로 안 나왔는데 중형을 선고했냐는 둥 도대체 제가 민사사건에 관여를 했는지, 형사사건에 관여를 했는지조차도 모르는 분까지 있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어 “저보고 한미FTA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하지 왜 언론플레이를 하냐는 분도 있었다. 이런 분들을 직장동료라고,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살았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제 인내심의 한계가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북받치는 감정을 털어놓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쓴다”고 배경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판부) 합의는 공개하지 않는다고 돼 있는 법원조직법을 어기지 않으려 했으나, 이제 실정법을 어기고자 한다”며 “그로 인해 제게 불이익이 가해진다면, 이는 달게 받겠다”고 각오를 밝히며, 합의과정을 공개했다.

이정렬 부장판사는 “석궁테러사건의 원인이 된 교수지위확인 등 청구사건은, 처음 그 사건이 결심된 후 이루어졌던 합의결과는, 원고 즉 김명호 교수 승소였다. 이 결론은 판사 세 명 사이에 이견 없는 만장일치 의견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재판장인 박홍우 부장판사(현 의정부지법원장)와 주심이던 자신 등 3명의 합의부 판사 모두 김명호 교수의 손을 들어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저는 판결초고 작성에 착수했는데, 예상치 않았던 큰 문제가 발견됐다. 청구취지가 ‘피고(성균관대)의 원고(김명호)에 대한 1996. 3. 1.자 재임용거부결정이 무효임을 확인한다’였다”며 “3월1일은 삼일절이어서 법정공휴일인데, 기록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 날 재임용거부의 의사표시가 학교로부터 발신됐거나, 원고에게 도달됐다는 증거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 부장판사는 “사건의 중요성에 비춰 보면 결론에 관계없이 당연히 상고가 예상되는 사건인데, 원고 승소판결을 했을 경우 학교측에서 ‘1996. 3. 1에는 원고와 관련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의 간단한 한 마디만 해도 공들였던 탑이 너무나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추가 변론에 재개했는데, 이는 학교측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김 교수를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변론재개 후에 당초의 결론이 뒤집히게 된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겠다. 그것은 김명호 교수께 다시 한 번 상처를 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라며 “석궁테러사건 이후에 항상 들었던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상고심에서 뒤집어지든 어떻든 간에 변론재개 없이 그냥 원고승소로 선고가 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기도 하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 부장판사는 “김 교수나 변호인 쪽에서 박홍우 원장께서 자해를 했다고, 증거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나본데 저도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100% 아니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원고 승소를 생각했던, 심하게 표현하자면 자신에게 석궁으로 테러를 가한 사람을 편들기까지 했던 분께서 무슨 이유로,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자해를 하고, 증거를 조작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어 “제가 주심을 맡아 썼던 판결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제대로 된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선정적인 용어를 써가며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보다는, 원고승소라는 결론을 다지기 위해 변론재개를 했는데 도리어 그 결론을 뒤집게 된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공감했던 박홍우 원장의 말씀에 더 믿음이 간다”고 증거조작을 주장하는 김명호 교수 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이 부장판사는 또 “저는 법원에 몸담고 있는 사람의 하나로서 그 영화를 꼭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악성 당사자라고, 악성 민원인이라고, 권리구제가 아닌 오로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기 위한 소 제기, 증거신청이라고 그의 행위를 무시한 적은 없는지,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왜 이런 행위를 하는지, 사람들이 왜 그 영화에 열광하는지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글은 다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고, 안주감이 되겠지요. 이 글 중에서 일부 표현을 가지고 말꼬리를 잡고, 또 자기들 마음대로 소설을 쓰고, 자기들 입맛에만 맞춘 말과 글을 써 대겠지요”라며 언론에 불신감을 드러내며 “저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기도 하고, 명색이 부장판사라고 하는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품위 없게도 이런 식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그런 것들을 따지기에는 너무나 지쳤다”고 고백했다.

이 부장판사는 끝으로 “절제라는 미덕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글이다 보니 난삽하네요. 그래도 마음은 한결 편해졌습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이라며 파장을 예감했다.

◈ 다시 주목받는 이정렬 판사의 2007년 1월17일 글

한편, 이정렬 부장판사는 실제로 석궁 사건 이후 2007년 1월17일 법원내부통신망에 김명호 전 교수를 배려하고 그의 입장에서 안타까워했는데 반대로 편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재판과 판결을 했다는 평가에 마음이 아프다며, 언론보도와 제기되는 여러 소문들에 대해 반박하며 떳떳함을 강조했던 글을 주목을 받고 있다.

<로이슈> 2007년 1월18일자 <법관 테러, 주심 이정렬 판사 “편파 판결은 모욕”> 보도

http://www.lawissue.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93

당시 이정렬 판사는 재판진행 과정을 설명하면서 “원고(김명호)가 상당히 실력 있는 출중한 사람이고, 입시문제오류에 관한 입증이 잘 돼 있었으며, 재임용거부결정이 문제오류지적에 대한 보복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어도 간접증거들에 의해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원고의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문제 삼는 대학의 주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이 판사는 “원고는 1996년 3월1일 재임용거부결정의 무효확인을 구했는데 실제로는 2월29일 재임용거부결정이 있어 이 청구는 더 살펴 볼 필요 없이 ‘이유 없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원고가 느꼈을 억울함과 받았을 고통에 비하면 사건을 ‘이유 없다’는 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서 변론재개결정을 하면서 석명준비명령을 만들어 쌍방에 대해 의문 있는 사항을 모두 반영했는데 원고는 재판부의 뜻을 간파하지 못하고 재임용거부결정이 3월1일임을 재차 주장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원고를 더 배려하는 것은 법관의 객관적 입장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부의 뜻을 몰라주는 원고가 야속했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박홍우) 부장님은 이를 다툼 없는 사실로 정리함으로써 원고에게 생기는 불이익을 막아줬다”고 원고를 배려했음을 강조했다.

또 “마지막 변론기일에 원고의 교육자적 자질에 관한 입증을 위해 피고가 신청한 증인들에 대한 신문이 진행됐는데 증인들은 원고에게 불리한 취지로 증언을 했고, 이에 반대신문 기회를 주며 원고가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며 탄핵해 주길 바라던 저로서는 의외의 일이었다”며 “원고는 ‘나는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지 가정교육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완성된 판결초고를 놓고 (박홍우) 부장님과 함께 원고가 지적하는 문제에 오류가 있었던 점, 학교로부터 보복을 당한 점, 실력에 비춰 학자로서는 아주 아까운 사람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해 이 점을 판결문에 반영하기로 하되, 원고의 제자들로부터의 평판 등이 교육자답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능력과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교육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아 재임용거부결정이 무효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취지를 판결서에 추가했다”고 설명했다.

이 판사는 “원고가 재판부가 얼마나 고민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불리한 판결결과가 나오게 됐는지에 대해 각고의 노력을 거쳐 밝힌 판결문이라도 읽어보고, 재판부의 뜻을 이해는 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알려고 했으면 이런 불행한 일(석궁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장 큰 아쉬움이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된 언론보도와 소문을 보면 원고가 학자적 양심으로 입시문제의 오류를 지적했는데 담당재판부는 원고의 양심적인 행위를 도외시하고 기득권층인 대학을 옹호해 원고에게 불리한 판결을 했다는 말을 접하고, 실로 황당하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황당함을 표시했다.

이어 “원고의 입시문제 오류지적행위가 양심적이고 용기 있으며, 정당한 행위라는 것은 재판부도 판결문을 통해 인정하고 있다”며 “그런데 어떠한 근거에서 저희 재판부가 원고의 양심적인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언론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특히 이 판사는 “저는 과거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무죄판결을 선고해 법원 대내외적으로 ‘진보적인 판사’, ‘튀는 판사’로 평가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제가 주심으로 관여했던 사건에서 담당재판부가 기득권층을 옹호했다고 하는 것은 저희 재판부를 떠나 제 개인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라고 분개했다.

이 판사는 “담당재판부 내에서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주심판사가 아닌 다른 배석판사가 판결문을 작성했다는 소문도 들었다”며 “하지만 결론을 도출하는 합의과정에 문제는 없었고, 판결문 문장 중 95% 이상은 자식을 키우는 심정으로 쓴 제 문장”이라고 말했다.

이 판사는 “법과 양심과 소신에 따라 재판을 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은 바라지도 않지만, 되려 피습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또 피습을 당한 것이 마치 재판과정상 문제가 있었다거나 사법부의 권위실추 때문이라고 분석해 버리는 상황”이라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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